'도이체 텔레콤' 조머회장 정부압력에 끝내 사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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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독일 정부의 사임 압력에 끝까지 버텨온 도이체 텔레콤(DT)의 론 조머 회장이 16일 결국 사임했다.

유럽 최대 통신회사인 DT의 이사회는 이날 임시 총회를 열고 헬무트 질러 이사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질러 회장은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 6개월간 한시적으로 회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이날 조머 회장은 이사회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회장이 이사회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면 사임만이 유일한 길"이라며 전격 사임을 선언했다. 1995년 취임한 조머 회장의 임기는 2005년까지였다.

조머의 사임에 대해 독일 정부는 즉각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그러나 야당은 한스 아이헬 재무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는 등 정부를 강력히 비난했다.

지난주부터 조머의 거취 문제는 독일 정계와 재계의 큰 관심사가 돼왔다. DT의 주식 43%를 보유한 최대주주인 정부의 사임 압력에 대해 당사자는 물론 임직원들이 강력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야당도 "총선을 의식한 정부의 희생양 만들기"라며 제동을 걸었다.

조머는 자신의 사임설이 흘러 나오자 "정부가 기업 인사에 관여해선 안된다"며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고 맞섰다. 회장 임면권을 가진 DT 이사회도 "공기업이 정치권의 노리개가 돼선 안된다"며 정부의 개입에 항의했다. 특히 이 회사 임직원들은 회장 사퇴반대 서명운동을 벌였고, 지난 12일에는 정치권의 간섭 중지를 요구하는 광고를 신문에 대대적으로 게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저항도 결국 독일 정부의 집요한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독일 정부가 조머를 중도하차시킨 이유는 무엇보다 오는 9월 실시되는 총선 때문으로 풀이된다. 주가가 2년 전보다 90%나 하락, 이대로 두었다가는 수백만 소액주주들의 표가 날아갈지 모른다고 본 것이다. 96년 14.32유로에 첫 거래된 DT 주식은 2000년 3월 1백4.90유로를 정점으로 하락, 지난달 말에는 8.14유로까지 폭락해 투자자들의 원성을 사왔다.

국내외에 25만7천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DT는 6백70억유로(약 79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부채로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어 왔다.

베를린=유재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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