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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해외 칼럼

터키는 유럽 안보의 핵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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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사실 터키의 대외정책은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런 터키의 입장은 서방의 이해관계와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터키를 끌어안기 위해서는 서방, 특히 유럽이 터키를 ‘서방의 손님’이 아닌 진정한 동반자로 여겨야 한다. 터키는 이미 주요 20개국(G20) 회원국이다. 빠르게 늘어나는 인구는 터키를 21세기 경제 강국으로 부상시킬 것이다. ‘터키=유럽의 병자’란 이미지는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안보리 결의 이후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유럽이 터키를 소외시켜서 벌어진 일”이라며 유럽을 강하게 비난했다. 게이츠의 발언은 핵심을 제대로 짚은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은 지금껏 터키에 유럽연합(EU)의 정책을 따르라고 하면서도 회원국으론 받아들이지 않았다. 터키와의 관계가 틀어진 것이 분명한 지금에 와서야 EU는 갑작스럽게 터키와 EU 가입 협상을 재개한다는 뜻을 밝혔다.

터키가 유럽 안보에 핵심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방이 지중해 동부와 에게해·발칸반도·카스피해·코카서스 남부·중앙아시아·중동 등에서 협력을 이끌어 내려면 터키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21세기 유럽의 안보는 상당 부분 유럽 남동부 국가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터키는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유럽의 안보 이해관계의 핵심 고리다. 그럼에도 유럽과 서방은 터키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보다는 터키를 러시아와 이란의 품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 정책은 모순적이고 근시안적이다. 수세기 동안 러시아·이란·터키는 지역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유럽의 정치적 무모함이 이런 사실보다 더 크게 작용한다. 물론 터키 역시 서방과의 통합에 목을 맨다. 서방과의 관계가 나빠지면 지역 내 터키의 지위도 약화될 것이다. 향후 터키가 이란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저지하지 못할 경우 터키가 이란 제재에 반대한 건 중대한 잘못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과 터키의 관계 악화가 중동 급진세력의 입지를 강화하는 상황에서 유럽 외교는 뭘 하고 있는가. 서방은 이스라엘과 터키의 지속적인 관계 악화를 감당하기 힘들다. 두 나라 관계가 회복되지 못한다면 이 지역은 영속적인 불안정에 빠질 수 있다. 부정적 영향은 관련 지역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코카서스 남부와 중앙아시아·우크라이나 등도 유럽의 에너지 안보를 위해 중요하지만 유럽은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유럽은 외교정책에서 주변국들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아 이들 국가와 굳건한 관계를 맺을 기회를 놓치고 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삶은 너무 늦게 오는 사람에게 벌을 내린다”고 했다. EU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
정리=정재홍 기자 ⓒProject Syndic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