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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전거로 45년을 달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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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3면

상주는 하얀 빛깔의 쌀·누에·곶감으로 해서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불려왔다.

여기에 요즘엔 은륜(銀輪·자전거)까지 보태져 사백(四白)의 고장이 됐다.

4만3천가구 12만8천여명이 사는 상주에는 8만5천여대의 자전거가 있다. 가구당 1.98대 꼴이다.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곤 모두 자전거를 타고 다닐 정도다.

상주의 각급 학교에선 차량보다 자전거를 더 중시해 교통안전 교육을 시킨다.

그래서 자전거에 관한 진귀한 기록이 어느 지역보다 많다. 자전거박물관도 만들고 있다.

경북 상주시 인평2리에 사는 조성채(73)씨는 이 고장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다. 상주 시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의 자전거는 1947년산이다. 일본의 자전거 메이커인 미야타(宮田) 제품이다.

조씨가 이 자전거와 인연을 맺은 것은 67년. 상주군보건소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였다.

"망가져 용도 폐기된 보건소의 공용 자전거를 당시 함께 일했던 X-레이 기사가 고치고 있더군. 그런데 웬일인지 나에게 '수리비만 주고 자전거를 가져가라'고 해 인수했지."

가격은 당시 쌀 한가마값(3천원)과 맞먹는 2천8백원이었다. 미야타 자전거는 이 때부터 조씨의 충실한 발이 됐다.

어려운 시절이라 자전거는 꽤 값진 물건이었다. 게다가 일제 유명 메이커여서 자전거가 없던 사람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이 자전거에는 젊은 시절 그의 희망과 고난의 역사가 오롯이 배어 있다. 조씨는 부인 정화순(69)씨를 뒤에 태우고 논밭을 누비며 데이트를 즐겼다. 정씨는 "영감님이 자전거를 많이 태워줬지"라며 쑥스럽게 웃는다. 주된 용도는 역시 출퇴근길 교통수단이었다.

56년 말단 공무원으로 출발해 84년 모서면 부면장(6급)으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낮엔 공무원으로 일하고 퇴근 후엔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보니 인평동을 떠날 수 없어 10㎞가 넘는 군청 소재지까지 자전거 출퇴근을 했다.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여서 힘껏 페달을 밟아도 40분은 족히 걸렸다.

출근 시간에 늦을까 속력을 내면 어깨와 허리가 결리고 머리까지 얼얼했다. 돌부리에 바퀴가 튀면서 넘어진 적도 많았다.

여름철이면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가로등 하나 없는 밤길에 헤드라이트조차 없는 자전거를 몰기란 쉽지 않았다. 꼬장꼬장한 성격 때문에 인사청탁도 못해 한지(閑地)로만 돌아다녔다. 자전거 출퇴근길이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었지. 성격이 그런 걸 어떻게 해."

군청 소재지로 이사를 가려고 해도 농사를 짓는 탓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공무원의 박봉으론 3남1녀의 교육이 쉽지 않아서였다.

퇴근 후나 쉬는 날엔 농기구를 싣고 논길을 누볐다. 그 사이 자전거는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안장의 스프링이 부러지고, 체인이 끊어져 수리한 것도 10여차례나 된다.

55년 된 그의 자전거는 어떤 모습일까.

사랑채 옆 구석에 세워진 미야타 자전거는 생각보다 깨끗했다. 보는 사람마다 10여년 된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뒷 짐받이의 'MIYATA'라는 영문과 앞 흙받이의 톱니모양 문양안에 새겨진 'M'자도 선명했다.

"차체 정도만 빼고 모두 새로 조립한 거야. 하지만 기름으로 깨끗이 닦으면 아주 멋있지." 조씨는 "지금도 새 자전거 못지 않게 잘 나간다"며 자랑했다.

그의 자전거 주차장인 사랑채 옆에는 모두 일곱대의 자전거가 있다. 모두 중고다. 고물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며 비웃던 사람들이 오토바이나 차량을 구입하면서 그에게 선물(?)한 것들이다. 펑크가 나거나 고장이 나면 이 자전거와 다른 것을 번갈아 타고 다닌다.

틈만 나면 윤활유를 치고 기름으로 닦아 광을 낸다. 타이어의 펑크도 직접 수리한다.

"구멍난 옷과 검정 고무신을 꿰매 신었던 우리 부모세대를 생각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지. 못쓰게 될 때까지 물건을 쓰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조씨는 카드 빚 때문에 강도짓을 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했다. 양복을 20년씩 입는다는 유럽 사람들이나 대패질도 하지 않은 나무로 집을 짓고 사는 미국인들의 예를 들며 근검절약을 거듭 강조했다.

반 평생을 함께 동고동락해온 자전거를 보는 그의 눈빛은 어린 자식을 대하는 듯했다.

그는 "이게 내 자식들을 교수·교사·기자로 키워준 일등공신"이라며 대견하다는 듯 자전거를 연신 쓰다듬었다.

"고물자전거를 타고 다니지만 명예롭게 공직을 마쳤고 자식들이 잘 하고 있으니 성공한 인생 아닌가. 티끌만큼도 후회가 없어."

조씨는 "자전거는 내 인생의 동반자이자 증인"이라면서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 자전거를 탈 작정"이라고 말했다.

상주=홍권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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