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詩엔 시대의 절규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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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시인 신경림(67)씨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후 4년 만에 신작시집 『뿔』(창작과비평사)을 펴냈다. 여덟번째 시집이다. 신씨는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고 한다. 세상사 모든일에 자연스러움과 거스르지 않음을 먼저 떠올리게 됐다. 이 시집에는 살면서 모르고 살았던, 혹은 잊었던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강 따라 노래 찾아 다니며 인생의 한고비를 넘은 시인을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이제 그만둘까보다. 낯선 곳 헤매는 오랜 방황도"('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라는 구절을 보면 길 떠남을 시작(詩作) 모티브로 삼아왔던 시인의 피로감이 느껴집니다.

"재작년이던가요. 새마을호를 타고 부산에 가는 길이었어요. 가다 보니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무작정 대구에서 내렸죠. 점심때라 대구역 근처에서 자장면을 한그릇 사먹고 거리를 배회하다 버스를 타고 부산에 갔어요. 늘 빠듯하게 일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며 살아온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살며 너무 놓친 게 많다는 느낌에 이 시를 썼습니다."

-그래도 『농무』로 국민 시인의 반열에 오르고 최근에는 방송에 소개된 『시인을 찾아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행복한 시인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 시인이 독자를 계속 만날 수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일이죠. 그러나 내가 내 인생에서 참의미와 참진리를 찾았느냐 하는 것은 그런 외적인 요소와 별개의 문제예요."

-시집 말미에 해설 대신 산문 '시인이란 무엇인가'를 붙인 게 특이합니다.

"매번 해설을 붙이기보다 내가 생각하는 시를 설명하는 게 독자들이 내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어요."

-70,80년대 민중시는 반성할 대목이 많고 그 시들 가운데 좋은 시로 우리 문학사에 남아 있을 게 몇 편이나 되겠느냐고 하셨는데요.

"민중시 비판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요. 80년대에도 내가 뜻대로 안 움직이니까 미워했을 사람이 좀 있었을 것입니다. 분단과 통일만 다루면 다 시가 된다는 잘못된 잣대에 따라 불량품이 양산됐어요. '사회성은 강한데 예술성은 약하다'는 식의 비판과는 다릅니다. 시는 말로 하는 예술이니까 사회성 자체도 명확한 말에 의해 경험돼야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 못한 대개의 민중시에는 독자와 영합하려는 혐의가 짙습니다."

-『농무』는 민중시의 문을 열어준 기념비적인 시로 평가됩니다. 그런 시인이 이런 비판을 하는 것은 이율배반적 아닙니까.

"위의 비판에 저 자신이라고 예외는 아니겠죠. 그러나 『농무』를 두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썼다고 평가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어요. 딱히 민중시라고만 보기는 어렵다는 뜻이에요. 『농무』에서 저는 사람들의 삶을 재료로 했지만 제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새 세계를 만들어냈어요. 한 편 한 편이 독립되고 완전한 우주가 되려고 한 거예요. 물론 민중시가 잘한 점도 있죠. 현실을 시 속에 수용하며 우리 시의 지평을 넓혔고 대중화한 측면 말이에요."

-90년 대 이후 요즘 시에 대해선 '말장난'이 너무 많다고 하셨는데요.

"90년대 시의 가벼움은 70, 80년대 민중시가 뭐가 잘못됐는지를 모르는 데서 오는 거죠. 민중시의 무거움에 대한 반동의 결과일텐데요 잘못이 반복되고 있어요. 생각나는대로 아무렇게나 떠들어도 되는 컴퓨터 탓도 있겠죠. 본질적인 것은 시정신의 결여 아닐까요. 억지에 의해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사소한 것에 매달려 시 자체를 왜소하게 만들고 있는 것 아닌가 고민해 봐야 해요. 절규성의 상실이랄까. 마야코프스키 말대로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응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어차피 시는 이상주의자의 길에 피는 꽃임을 잊지 말아야죠."

-『농무』의 시인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부담을 느끼시는 것 같은데요.

"남의 평가에 개의치 말아야죠. 그럴 나이도 지났고. 아마도 뒤에 쓴 시가 앞에 쓴 시보다 못해서라기 보다 『농무』가 사람들에게 너무 세게 각인됐기 때문일 겁니다. 왜 내가 갇혀있겠어요."

-시집 후반부에는 보고타·하노이 등 외국 여행을 다니며 쓴 시들이 있는데요, 요새는 얼마나 자주 다니십니까.

"예전엔 일년의 절반을 객지를 떠돌며 보냈지만 요새는 한 한달 쯤이나 될까요. 여행이나 시 쓰는 일이나 같은 일이죠. 영혼의 모험, 영혼의 개척자, 정신의 여행…."

-앞으로도 할 일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동국대 석좌교수로 강의 하나 하는 것 말고 감투는 다 버렸습니다. 이제까지 쓴 시를 능가할 시 30편 쓰기가 첫째 목표고요. 외국에 나가 한 1년쯤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어보는 것이 둘째 목표예요. 셋째는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26권을 다 읽는 겁니다. 고교 시절 내 문학의 길을 열어준 이 책들을 다시 읽고 싶어요."

우상균 기자

집으로 가는 길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 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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