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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서해도발] 南北협력·北美대화 또다시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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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9일 서해상에서의 북한 해군 도발은 우리의 대북 화해·협력 의지와 월드컵 축제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남북 관계는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이래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됐고,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에 따라 북한의 외교적 고립은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북·미 양측이 협상 중인 미국 특사의 방북에도 빨간불이 켜진 분위기다. 미국이 대북 강경 자세로 돌아서고, 북한 배로 추정되는 괴선박의 국적 확인 작업에 들어간 일본이 대북 압박 정책을 펴면 한반도 정세는 자칫 난기류에 휩싸일 수도 있다.

◇위기 맞은 남북 화해 분위기=북한의 이번 도발로 남북 정상회담 이후 꾸준히 이어져온 남북 화해협력 분위기는 위기를 맞게 됐다. 특히 대북 교류·협력과 지원에 대한 국민 여론이 나빠질 것으로 보여 현 정부의 햇볕정책도 암초에 부닥칠 수 있다.

남북간에는 당분간 냉기류가 불가피하다. 우리측이 북한군의 도발과 관련해 사과, 재발방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 데 대해 북측이 "남측의 선제공격"이라고 맞받아쳤기 때문이다. 더구나 북한은 북방한계선(NLL)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 북한군 도발을 둘러싼 대립은 장기화할 것이 분명하다.

이에 따라 당분간 당국간의 대화는 물론 8·15 남북 공동행사 같은 민간접촉도 차질이 예상된다. 북한은 1999년 서해교전 직후에도 "당분간 남측 인원들의 평양 방문과 접촉을 제한 또는 중지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종석 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연구실장은 "남북간 교전 상황이 설사 우발적인 것이라고 해도 월드컵 기간 중에 일어난 데다 사망사고까지 발생한 만큼 남북 관계에는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현 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한 수순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비관적인 관측도 나온다. 이번 사태의 책임을 남측에 전가해 갈등 국면을 조성함으로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 등 6·15 공동선언 이행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한편 차기 정부와의 관계를 준비하려 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번 교전이 금강산 관광과 경협 등 교류의 맥까지 단절되는 사태로 이어질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남북한 모두 군사적 충돌로 인한 긴장이 확대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쪽으로 교감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남북한이 99년 서해교전의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막후 접촉을 통해 1년 뒤에 정상회담을 연 점도 이런 전망을 낳게 한다.

◇북한의 서방 외교 발목 잡을 듯=북한의 이번 도발은 남북관계나 한반도 안보 정세 차원에서만 볼 사안이 아니다. 세계의 축전인 월드컵에 대한 '테러'의 측면도 있다. 전 세계인의 눈과 귀가 한국과 터키의 3~4위전에 쏠려 있는 상황에서 발포한 것이다. 도발 자체는 월드컵 경기와는 직접적 관계가 없지만 그 여파는 확대될 수밖에 없다.

당장 북한은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에 직면하게 됐다. 그만큼 외교적 고립은 커지고 대외적 신인도는 땅에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은 우리측이 선제공격을 했다고 발표했지만 월드컵 개최국이 선제공격할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월드컵 공동 개최국인 일본의 언론들은 벌써 북한의 도발을 비난하는 논조를 보이고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북한의 이번 도발은 그 의도 여부를 떠나 스포츠를 통해 세계가 하나가 되려는 시대정신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이번 도발은 북한의 대서방 외교의 발목을 잡는 자충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도발은 북·미대화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 뻔하다. 양측이 막바지 절충을 벌이고 있는 미국 특사의 방북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북한 내의 군부를 비롯한 강경파가 북·미대화를 비롯한 서방과의 관계개선을 꾀하려는 외교노선에 제동을 걸기 위해 도발한 것이란 분석도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신지호 선임연구원은 "북한군이 갑자기 의도적 도발을 한 것은 북한 권부 내의 강온파간 갈등의 산물일 수 있다"며 "이럴 경우 북·미대화는 성사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미국도 적극적인 대화에 나서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특히 월드컵이 열리는 시기에 북한이 도발해온 점을 감안하면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에 나설 명분도 없다.

미국은 우리 정부와 월드컵 테러공조를 해온 만큼 북한의 도발을 테러 차원에서 연계시킬 가능성도 없지 않다.

오영환·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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