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新무협의 무림파천황 꿈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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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의(義)를 알고 협(俠)을 행한다. 기구한 신세의 소년이 온갖 고난을 뚫고 경천동지할 무공을 얻어 강호를 질타한다. 마두를 처단해 원수를 갚고 무림의 영웅으로 우뚝 선다. 그속에는 사나이들의 의리가 있고 가슴 저리는 사랑이 있다. 밤을 꼬박 새면서 무협의 세계에 빠져든 독자들이 한두명이었는가.

1968년에 출간돼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김광주의 무협소설 『비호』가 34년 만에 재출간됐다(20일자 14면). 환호하고 탄식하며 손에 땀을 쥐면서 한권 한권 읽어나가던 기억이 남아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30년 만에 다시 읽은 『비호』는 예전 같은 감동을 주지 못했다.

왜? 다시 보니 사건 전개에서 우연을 남발하는 데다 구성이 너무 뻔한 점이 거슬린다. 등장인물의 형상화나 심리묘사도 부실하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흠이 이제는 쉽게 눈에 띄는 것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 사이에는 한국 신무협이 있었다. 신무협이란 90년대 중반에 대두된 한국 무협소설의 새로운 유형을 말한다. 탄탄한 구성과 인과관계, 생생한 인물 및 심리 묘사, 세련된 문체로 무장한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생의 의미에 대한 모색과 반성'을 담은 작품도 적지 않다. 이는 작고한 평론가 김현이 말한 바 (고급)문학의 본질적 요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신무협은 시간 때우기용 통속소설이 아니라 '문학'으로 볼 수도 있다.

문학평론가 성민엽(서울대·중문학)교수가 계간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기고한 '한국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를 보자.

성교수는 좌백의 『대도오』를 예로 들면서 "그들의 목표는 미리 주어진 생의 의미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사회인이 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의미를 의심하고 모색하는 과정에서 실존적 충실을 획득하는 데 있다. 김현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이 대목에서 『대도오』는 예술과 만나는 것이다"고 말한다.

상당한 애호가층을 이끌며 성세를 구가하던 신무협은 요즘 팬터지 소설의 공세에 밀려 새로운 문제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비호』에 이어 『정협지』『군협지』 등 추억의 작품들이 재출간되는 요즘, 한국에 독특한 '장르 문학'신무협이 다시 날개를 펴 재미와 감동을 선사할 날을 기대한다.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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