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강한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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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대학시절에도 짧은 스포츠 머리였어요. 오히려 지금보다 더 짧았었는데…. 단짝 친구가 머리를 길러 묶고 다니길래 저는 반대로 해야겠다 싶었죠. 어색해 보이나요?"

시대를 막론하고 머리를 자른다는 행위는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실연당했건 심기일전이건 보는 이들은 몇초간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재황(27)도 그랬다.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이 짧은 스포츠 머리의 청년을 금세 알아보지 못했다. 어디서 저런 살벌한 눈빛이 뿜어져 나오는지 당혹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그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이재황은 그간 엘리트 학생 역에 단골로 출연했다. 깔끔하고 똑부러지는 인상 때문인지 KAIST 학생(드라마 '카이스트')·의대생(단막극 '어쩌면 좋아')·서울대 경영학과생(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등 모범생 코스만 섭렵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엔 머리까지 깎아가며 자신의 이미지를 1백80도 확 바꿨다.

27일부터 성인 연기자가 등장하는 SBS 일일극 '오남매'에서 대책없는 반항아 우식으로 분한다. 우식은 가출했다가 사고를 쳐 푼수 같은 여자를 혹으로 데려오기까지 한다. "아휴, 저걸 그냥!" "돌아버리겠네"라며 시시때때로 여자를 때려 시청자로부터 욕도 많이 먹게 생겼다.

"사람들은 깡패 연기가 더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만 촬영해 보니 그렇지 않더라고요. 모범생 연기야 대사 잘 외우고 상황파악 잘하면 되지만 깡패 연기는 차원이 달라요. 능청맞거나 잘난 체 하는 역할이 오히려 편하다는 걸 이제서야 실감하네요." 깡패 연기는 자칫 잘못하면 무조건 큰소리치고 오버액션을 남발하기 때문에 그 완급 조절이 너무나도 어렵단다.

이재황은 데뷔 4년차지만 그간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그를 세상에 알린 건 시트콤 '웬만해선…' 정도다.그는 코미디·정극·추리극 등 다양한 형태의 연기를 소화해내야 하는 시트콤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지만 아직도 그 깊이가 얕다고 생각한다.

"제가 욕심도 많고 예민해요. 스스로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본 외우고 연기하는 데 남들보다 몇배나 신경써요. 요즘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걱정을 한다니까요."

그의 이 근본적인 콤플렉스는 가수 활동을 준비할 때부터 비롯됐다. 공학도(경희대 원자력공학과)였던 그는 공부보다 노래가 좋았다. 대학 시절 내내 음반 준비 작업을 했고 댄스곡·발라드·힙합·R&B 등 손대보지 않은 장르가 없다. 그러나 끝내 가수가 되길 포기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가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연기도 그만큼 어려웠어요. 다른 점이 있다면 노력하는 만큼 결실이 금방 나타난다는 거죠." 몇년 만에 머리를 짧게 자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최고의 연기자가 되겠다는 욕심을 가슴에 하나 둘 새기고 있었을 것 같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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