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비리로 5번째 고개숙인 金대통령 下野까지 고심한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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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저는 지금 고개를 들 수 없는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21일 '아들 게이트'때문에 다섯번째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이날 저녁 차남 홍업(弘業)씨가 검찰에 구속된 지 한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사과 형식도 청와대 본관에서 TV생중계를 통해 金대통령이 국민에게 직접 육성(肉聲)으로 하는 방식이었다. 金대통령은 지난 4월 26일 이래 박선숙(朴仙淑)대변인·박지원(朴智元)비서실장을 통한 '대행사과'나 국무회의, 부처업무보고를 통한 '발언록 사과'만 했었다. 지금처럼 대국민 육성사과는 처음이다. 사과 내용도 자신의 심정을 구체적으로 담아냈다. "국민과의 약속을 결국 지키지 못했다" "이렇게 참담한 일이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했다"는 대목은 지난 몇차례의 간접사과에선 볼 수 없었던 내용이다. 金대통령은 사과 문안을 직접 작성했다.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金대통령이 두 아들의 비리문제 때문에 "저의 처신에 대해서도 심사숙고했다"는 부분이다. 대통령 주변의 사람들은 金대통령이 자신의 하야(下野)문제까지 염두에 둘 정도로 고심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임기말 권력누수에 시달리는 대통령이 도덕성에 치명상까지 입고 국정을 제대로 이끌어갈 수 있겠느냐는 여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른 관계자는 "金대통령이 국정 전면에서 손을 완전히 떼고 총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일종의 '책임 총리제적 국정운영'도 고려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金대통령의 사과는 형식이나 내용에서 과거보다 진전되긴 했지만 어떤 후속조치도 담고 있지 않아 여야 정치권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청와대측도 일단 월드컵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이런 수준에서 버텨내고, 그후 다각적인 민심수습책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남 김홍일(金弘一)의원의 거취와 아태재단의 정리가 후속 조치의 대상으로 검토되고 있다. 또 민주당 쪽에 대통령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지 말고 독자적인 '과거청산 프로그램'을 진행해도 무방하다는 신호를 보내는 이른바 '6·29식 절연방식'도 고려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한동(李漢東)총리를 비롯한 전면 개각을 통해 민심을 수습한다는 방안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전영기 기자

대국민 사과성명 <요지>

고개를 들 수 없는 심정입니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저는 자식들이나 주변의 일로 걱정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여러 차례 국민 여러분 앞에 약속 드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저는 몇달 동안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껴왔으며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마음의 상처를 드린 데 대해 부끄럽고 죄송한 심정으로 살아왔습니다. 제 평생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렇게 참담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모두가 저의 부족함과 불찰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거듭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제 자식들은 법에 따라 엄정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의 처신에 대해서도 심사숙고했습니다. 널리 국민의 여론도 살펴보았습니다. 자식들의 문제는 법에 맡기고 저는 국정에 전념하여 소임을 완수하는 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큰 아량과 이해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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