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중국을 무서워하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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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중국 경찰이 베이징(北京)의 한국대사관 건물에 침입해 탈북자를 강제 연행하고 이를 말리는 한국 외교관을 폭행했다. 어느 나라에서도 경찰은 권위적이고 폐쇄적이다. 날씬한 국제적 안목이나 분별력은 경찰의 것이 아닐 때가 많다. 공안(公安)이라고 부르는 중국 경찰은 이 점에서 다른 나라 경찰에 비해 한술 더 뜨기가 쉬울 것이다. 중국은 아직 반민주적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외교 만행은 패권적 오만

문제는 중국의 외교부마저 대변인의 입을 통해 이 일을 정당한 것으로 강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주한 중국대사관까지 이 강변에 적극 가세시키고 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중국 공안의 부분적 조잡(粗雜)이 아니라 중국 정부의 전체적 실상(實像)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 문제를 세가지 경우로 나눠 토론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한국만이 아니라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외국공관과 주재외교관의 신체에 대한 불가침 원칙이라는 전지구적 조약을 무시하는 것을 일반적 원칙으로 삼고 있는 그런 존재인가, 아니면 유독 한국이나 몇몇 만만하게 여기는 이웃나라에 대해서만 자행하는 근공적(近攻的) 지역패권주의와 무법자적 오만인가, 아니면 오직 탈북자 문제만은 중국으로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막아야 하는 특수한 것인가.

진실이 이 세가지 가운데 어느 것에 있든, 또는 세가지 모두가 복합된 것에 진실이 있든, 한국 사람들은 중국 정부에 대해 분개한다. 그리고 충고하고 요청하고자 한다. 분개하는 것은 중국 정부가 국제조약을 위반하면서까지 한국의 주권과 인민을 의식적으로 능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충고는 이 분개와 무관하지는 않으나 결코 감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 충고는 다름이 아니라 한국은 이미 중국의 변방이 아니라 둥근 지구 위의 어느 나라나 다 그런 것처럼 글로벌화된 세계의 일원이고 또 중심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이다.

수천년 동안 동북아에 군림해온 중국의 패권주의는 중화(中華)와 변방(邊方)의 이분법에 기초했다. 중국은 변방을 만이융적(蠻夷戎狄)이라고 불러 야만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이이제이(以夷制夷)와 원교근공(遠交近攻), 이 두가지 군사전략으로 변방을 침략하면서 중국을 넓혀갔다. 그 후에는 문화(文化·한자를 배워 쓰게 함)와 왕화(王化·중국의 제도를 본받고 중국 천자의 제후국이 되게 함)를 통해 변방국을 간접통치했다.

20세기 초에 중국 자신이 서양과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된 것은 이런 중화(中華)체제가 먼저 자멸적 종말을 고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인들이 중국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은 지난 세기 초 열강의 침략을 받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후진적 공산체제에 빠져 있다가 시장경제혁명을 통해 재생하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중국 자신이 국내에서는 어떤 체제를 유지하든, 어떤 나라와는 특별히 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든 그것은 중국의 선택에 달렸다. 그러나 중국은 착각해서는 안된다. 중국이 그외의 나라에 대해서는 오만하게 지역적 패권을 행사하는 것을 용인할 이웃나라는 없다.

가까울수록 배신감 더해

중국의 이웃들은 이미 오랑캐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중국을 웃도는 민주적 문명국들이다. 이 이상 이이제이도 원교근공도 불가능하게 됐다. 옛날의 사이(四夷)를 포함하는 다원화된 민주국가들의 동맹(同盟)이 언제라도 중국의 패권적 오만행동을 포위·대항할 것이다.

중국에 있어 북한은 특별히 중요하고 탈북자는 매우 귀찮은 골칫거리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고 동정한다. 그러나 북한은 아무튼 인민을 기아에 방치한 지가 이미 참을 수 없을 만큼 오래된 나라다. 사람에게 먹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조국도 이념도 사람에게는 배고픔만큼 절실한 것이 못된다.

한국 사람들은 중국 정부가 적어도 외국 공관 내부까지 들어간 탈북자는 그들을 받아주는 어느 나라에라도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중국을 1992년 수교 후 마음 가까운 붕우국(朋友國)으로 여기고 있다. 이번 사건이 한국인의 이런 마음을 배신한 것이라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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