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적인 월드컵 열기 그 사회학적 좌표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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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1960년대 중반 무렵 일간지 평기자로 근무했던 선배로부터 들었던 얘기를 말머리 삼아보자. 당시 그 분은 막 배달된 경쟁지를 받아보며 과장없이 전율을 했다. '대학생 등반대 설악산서 설화(雪禍)로 몰사'가 1,2면은 물론 사회면까지 도배한 파격의 지면 때문이다. 이 도발의 무게는 '일가족 연탄가스 질식사'식의 사건사고가 지면을 장식하던 옛날상황을 염두에 둬야 제대로 가늠된다. 즉 '놀러간' 젊은 것들의 횡사란 기사 축에도 못끼던 시절이었다. 놀랍게도 그 기사는 심층취재 방식이었다. 서두가 이랬다. "젊은 그들은 꽃잎처럼 스러져갔다". 선배의 코멘트가 인상적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지면의 등장과 함께 한국사회가 사람의 가치를 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단순 사건사고보다 젊은이들의 모험과 성취에서 오는 죽음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쪽으로 뉴스의 잣대가 바뀐 것이었다. 문제의 신문은 한국일보다. 발행인 장기영씨가 지휘하는 그 신문이었기 때문에 그런 지면이 가능했다. 이 일화는 장기영 평전으로도 읽히는 멋진 책 『신문발행인의 권력과 리더십 연구』(나남출판·1999)에도 나오지 않는, '지면 변화로 본 사회사'다. 옛날 얘기를 꺼낸 것은 지금 이 사회의 전례없는 열기 분출 때문이다. 또 탄력적인 지면, 즉 사회 동학(動學)을 읽어내는 어젠더 세팅을 통해 월드컵의 사회심리를 제대로 포착해보기 위해서다.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그리고 지구촌이 놀라는 전국 규모의 길거리 응원전과 열광은 결코 축구 얘기로 국한할 수 없다. 그 이상이다. 전례없는 혁명적 에너지의 폭발에 대한 사회사적 자리매김과 사회심리 규명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유감스럽게도 저널리즘은 이 현상에 적절한 네이밍(문패달기)과 규명작업에 다소 모자란다. 때문에 사회표정 스케치와 게임분석이 지면에서 모래알처럼 버석거리며 따로 논다. 이것을 한데 묶는 문패, 즉 '2002 한국에너지' 혹은 '2002 한국사회 신명' 등 화룡점정(畵龍點睛) 혹은 사회코드에 대한 네이밍이 필수다.

이 네이밍과 함께 어떤 사회적·세대간 동학이 작용하고 있나를 다각도로 포착해야 한다. 그래야 절차적 민주화를 위한 시민혁명인 87년 6·10항쟁과의 차별성이 가늠된다. 정치적 동인(動因)과 또 다른 후기 산업사회 맥락 말이다. 참고항목도 없지 않다. 20세기 후반 이후 서구의 사회변동과 대중의 광범위한 사회진출 현상 말이다. 따라서 2002년 한국사회 신명은 사회학자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명저 『신좌파의 상상력-세계적 차원에서 살펴본 1968년 혁명』(이후·1999)의 분석틀이 일단 유효하리라.

"68혁명 당시 거리에 나선 사람들은 꿈꾸었다. 노동이 유희가 되고, 로고스와 에로스가 재통합되는 미래 말이다. 이것이 후기산업사회의 상상력이다." 물론 기자의 이 문제제기란 시론(試論)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세대의 지금 경험을 유의미하게 자리매김하는 작업이다. 그걸 제대로 못하면 지금의 에너지 폭발은 한국사회사의 호적에 이름도 채 오르지 못하고 만다. 그 경우 일회성의 '설사'로 잊혀질 것이 우려된다. 정말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혁명적 에너지 분출, 그것의 실체란 과연 무엇이고 어떤 맥락일까? 그것이 못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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