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풍년 걱정보다 쌀 관세화 속도 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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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요즘 농림수산식품부 공무원들, 남는 쌀 걱정에 땅이 꺼질 지경이다. 연이은 풍년에 쌀 재고가 보관 한도인 170만t에 육박한다니 그럴 만도 하다. 그렇다고 ‘흉년’ 들기를 바랄 수도 없기에 농식품부에선 이런저런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오래 묵은 쌀을 사료용으로 쓰자는 아이디어도 그중 하나다.

경제성만 따지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쌀은 1년만 지나면 밥맛이 확 떨어진다. 5년쯤 묵으면 주정용으로 팔 수밖에 없는데 한 가마니(80㎏)에 1만8400원밖에 못 받는다. 이걸 사료용으로 팔면 한 가마니에 2만원을 받을 수 있으니 예산도 아끼고 사료용 옥수수 수입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쌀은 경제 논리가 잘 안 통하는 분야다. 이 방안에 대해서도 농식품부의 고민이 컸다. 결식 아동이 60만 명이 넘는다는데 쌀을 소·돼지에게 준다면 과연 국민이 납득할까 .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게 뻔하다.

정부는 이미 지난해 쌀 조기 관세화를 수용한다는 입장을 정했다. 의무적으로 수입하는 물량이 해마다 2만t씩 늘어나는 걸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론 “농민단체의 합의가 우선”이라고 한 발 빼는 모습이다. 9월을 넘기면 올해 관세화 수용은 물 건너가지만 급한 기색이 없다.

벼 대신 다른 작물을 심도록 유도하는 사업도 지지부진하다. ‘정부 말에 따르면 ㏊당 300만원을 주겠다’는 당근도 내놨다. 농민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 전화만 해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세상인데 이 정도 돈 받고 농사를 포기할 순 없다는 것이다.

농식품부 공무원도 이를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예산 확보가 안 됐다”는 이유로 불구경만 하고 있다. 장태평 장관은 “인도적 차원에서 쌀을 지원하는 것은 바람직하다”면서도 “남북 관계 개선이 전제돼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농식품부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주곡 문제, 이처럼 고려해야 할 게 많다. 그렇다 하더라도 농식품부가 과연 생각 아닌 실행은 얼마나 해 왔는지 묻고 싶다. ‘이대로 가면 욕은 안 먹는다’는 생각이 더 큰 건 아닌지 궁금하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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