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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넓은 마당서 너울너울 '오곡제' 열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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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3면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총독부를 만들었다. 조선은 일본의 것이라는 결정적 시위의 장소가 바로 청와대 자리다. 서울 도성의 정점, 백두대간의 지기가 흘러 내리는 곳, 바로 그 혈에 일제는 쇠막대기를 쳐박아 넣은 것이다. 이로 인해 서울은 균형과 통일성을 잃고 말았다.

덕수궁·경희궁·사직단의 서쪽 축, 경북궁의 중앙 축, 종묘·창경궁·창덕궁의 동쪽 축, 이 모두가 청와대로 모이고 인왕산·삼각산·낙산·북한산 모두가 청와대 자리를 병풍처럼 둘러싼다. 그런데 청와대가 거기 버티고 있으니 모두의 기가 끊겨버렸다.가시철망으로 뒤덮여 감금된 산들 하며 이리저리 파괴된 궁성들.

또 일제는 더 나아가 창덕궁과 종묘를 억지로 절개했다. 조선왕조의 사직단과 함께 2대 성소의 하나인 종묘의 뒷골을 파내어 돈화문과 원남동을 잇는 길을 만들었다.

우선 청와대를 옮기자! 옮길 곳은 여러 전문가들의 지혜를 모아 정하면 될 터이니 내가 상관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다음은 잘려져 나간 종묘의 뒷산을 되살려내야 한다. 오소리만 걸어 다니는 육교 하나로 겨우 창덕궁과 연결되어 있는 종묘를 본래대로 복원해야겠다.

이제 전체를 다시 한번 훑어 보자. 모든 길은 백두대간에서부터 서울 곳곳으로 하나도 막힘없이 흐르고 그 역으로 서울의 모든 기운은 자연스럽게 청와대 자리를 거쳐 백두대간을 타고 오른다. 말 그대로 서울이 해방되는 순간이다.

나의 꿈은 여기서 시작한다. 나는 오곡제를 꿈꾸어 왔다. 청와대 자리는 성소다. 즉 성혈의 자리에 속한다. 따라서 이곳은 어떤 인위적인 시설이나 구조물이 있어서는 안될 자리다. 자연 그대로 남겨 놓아야 할 자리다. 그래서 조상들은 이 자리를 비워 놓은 것이다.

제단이 있어야 할 자리, 신께 제를 올려야 할 자리다. 우리는 축제를 잃어버렸다. 억지춘향식 이벤트는 많아도 진실로 신께 제의를 표하는 일은 잊은 지 오래다. 감사하는 마음, 불확실한 것을 무서워하고 보이지 않는 큰 힘에 몸을 낮추는, 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잊은 지 오래다.

모두 내가 잘났고 모르는 것이 없으며 못할 일이 없다고 미쳐 날뛰고 있다. 신의 영역을 유린하고 다닌 지 오래다. 그 신이 자신이라고 믿고 지낸 지도 오래되었다. 예수·석가모니·마호메트 모두 인간의 모습을 한 신들이다. 신이 인간화했으니 나 또한 신인 것이다. 만약 인간으로 신의 모습이 현현하지 않았던들 인간이 이렇게까지 오만했을까?

고대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처럼 우리에게는 일찍이 제천의식이 있었고 추수감사제가 있었다. 이를 현대적으로 되살리는 꿈을 꾼다. 축제는 추수가 끝난 가을날로 일주일 동안 계속되어야겠다. 제사장은 인터넷으로 뽑은 가장 깨끗하고 추앙받는 분으로 모신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심부름꾼들은 자원자로 한다. 국민은 각자 자기가 먹을 하루의 식량을 가져온다. 제사 지내는 날 하루는 금식한다. 그러나 밤, 제사가 끝난 다음은 마음껏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논다.

사람들은 가져온 오곡 - 벼·보리·콩·조·기장(밀)- 의 노적가리를 황금색 벼를 중심으로 쌓아 올린다. 벼의 높이는 50여m가 되었으면 좋겠다.나머지는 20m. 노적가리 주위에는 거대한 10여개 정도의 오곡 조각상들이 세워진다. 축제 마지막 날은 그 노적가리에 영상을 쏘고 오곡을 예찬하는 노래를 창작하여 함께 부르고 오곡을 상징하는 각자가 만든 의상을 걸쳐 입고 한 생명으로 태어났음을 스스로 축복하는, 질탕하면서도 엄숙한 축제를 벌인다.

이 축제는 오곡제라는 기본틀은 그대로 유지하되 해마다 가장 창의적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한 예술가에게 기획 연출을 맡겨 그의 예술적 기량이 모두 발현되도록 함과 동시에 책임도 철저히 묻는 전통을 만들어 간다. 그 평가는 엄정하고 무섭다.

우리의 축제, 우리의 노래, 우리의 그림, 우리의 춤, 우리의 흥, 우리의 잔치를 우리가 만들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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