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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商시스템 뜯어고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한 마디로 현재의 우리의 통상 시스템은 잘못돼 있다. 왜냐? 지난날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들 우리 통상의 패러다임이 변했다고 한다. 무엇이 변했기 때문인가. 적어도 여섯가지 면에서 구조적인 변화가 있었다.

전문화 급한 무역委 체제

첫째, 과거와 달리 우리 기업을 위해 정부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졌다. 옛날에는 수출보조금·비관세 장벽 등 음으로 양으로 우리 기업들을 도와줄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세계무역기구(WTO) 시대에는 그런 모든 것들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둘째, '우리'의 개념이 모호해졌다.삼성전자 주주의 거의 60%가 외국인인 마당에 누구를 돕는 것이 우리를 돕는 것이란 말인가.

셋째, 무엇이 한국 기업을 진정 돕는 길인가도 불분명해졌다. 삼성의 '애니콜' 휴대전화에서 보듯이 한국 제품이 국내에서 외국 제품과 피 터지게 싸워 이길 때 비로소 세계 시장에서도 이길 수 있다. 어설프게 한국 제품 도와주는 것은 그 기업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도리어 경쟁력을 약화시키게 된다.

넷째, 한국 제품은 이제 더 이상 싸구려가 아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품이 1백개나 된다. 더 이상 싼값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고 덤핑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많다.

다섯째, 국내 시장이 너무나 중요해졌다. 옛날에는 국내 시장은 주로 국내 제품들끼리 경쟁하는 '도토리 키재기'의 시장이었다. 이제 국내 시장은 세계 14,15위의 엄청난 시장이 됐고 전세계 모든 제품들이 한국 시장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우리 중소기업들의 거의 반(44%)이 이미 외국 제품과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제 한국 시장에서 이기지 못하면 세계 시장에서도 이기지 못한다는 면에서 한국 시장은 수출의 전초전이 돼 버렸다.

여섯째, 국제 통상은 이제 법의 지배(Rule of Law)의 시대가 왔다. WTO 체제의 확립으로 어떤 강대국도 이제 통상 상대국을 마음대로 깔아뭉갤 수 없게 됐다. 통상도 이론과 논리의 싸움이 돼 버린 것이다. 통상에 있어 이 여섯가지 구조적 변화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가지 시급한 과제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국내 시장에서의 공정경쟁 확립, 둘째 통상 행정에 있어 글로벌 스탠더드 확립, 셋째 수세적 통상에서 공세적 통상으로의 전환이다.

미국의 무역위원회(ITC)는 수입품이 미국 시장에서 덤핑 등 장난을 못치도록, 즉 공정경쟁을 보장함으로써 미국 기업들에 엄청난 도움을 주고 있다. 수입품과 경쟁하는 기업들에 함포 사격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무역위원회가 있지만 최근 조사에 의하면 우리 중소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열명 중 근 아홉명은 무역위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역위원회가 중소기업들을 도와줄 수가 없다.

WTO 체제가 확립되면서 모든 나라들이 각국 무역위원회의 행정과 결정 과정 하나 하나를 유리알 보듯이 주시하고 있다. 모든 행정행위와 결정들은 전문가에 의해 국제적으로 확립된 법리와 판례에 입각해,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내려지고 집행돼야 한다. 우리 무역위원회의 위원 여덟명 중 일곱명은 비상임이고 한명 있는 상임위원마저 1년이 멀다 하고 바뀐다.

수비형보단 공격형으로

생업이 따로 있는 마당에 도대체 글로벌 스탠더드가 무엇인지, 법리가 무엇인지 따지고 공부할 여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 통상의 시대인 오늘날 제대로 된 나라 치고 통상의 핵심인 무역위원회를 이렇게 비전문 체제로 둔 나라가 없다.

수세적 통상에서 공세적 통상으로 나가야 한다. 통상을 좀 하는 나라 치고 자유무역협정 하나 없는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다. 우리는 아직도 수세적 통상의 패러다임 속에 꽉 묶여 있다.

왜 이렇게 됐는가. 한 마디로 우리 통상 제도가 과거의 패러다임 속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통상 질서 확립을 공정거래 차원이 아니라 산업정책의 하위 개념으로, 또 통상 교섭을 장사의 차원이 아니라 외교의 하위 개념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경제 전쟁, 즉 통상의 시대에 통상은 산업정책이나 외교의 차원을 벗어난 독자성과 최우선적 중요성을 가진 기능이다. 국제 통상의 두 축인 무역위원회와 통상교섭본부에 주체적이고 자율적 생명력을 주는 방향으로 우리의 통상 시스템을 뜯어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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