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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 문학의 무대 보령… 작가와 함께 돌아봤더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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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지난 4일 꾸물꾸물한 날씨가 영 시원찮은 날, 충남 보령 일대에선 소설가 이문구(61)씨와 독자들이 이곳 저곳을 거닐고 있었다. 이씨가 작품의 배경으로 삼은 고향 마을에서 문예창작학회가 주최하는 이문구 문학기행 행사가 열린 것이다.

"이게 그 화살나무여."

2000년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인 『내 몸은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왔다』에 나오는 장석리 화살나무는 이씨의 집 마당에서 자라고 있었다. 가지가 꼭 화살촉 모양으로 생긴 그 나무를 비롯해 소설 속의 장평리 찔레나무, 장천리 소태나무, 장이리 개암나무가 다 한 곳에 모여있었다.

농가가 고층아파트로

『내 몸은…』의 무대는 이씨의 집 근처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바탕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이씨가 "내 작품의 인물과 무대를 보자면 10%는 실제 모습에서 따온 것이고 나머지 90%는 이 사람 저 사람의 성격을 섞고 상상을 통해 만든 것"이라고 설명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씨는 1989년부터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이 집에서 살고 있다. 현재는 경기대 문예창작학과에서 강의를 하느라 서울 잠실로 생활무대를 옮기고 간간이 고향에 내려와 지내곤 하지만 지나는 사람마다 "선생님" "선생님" 할 정도로 고향에선 유명인사다.

이에 앞서 가본 『관촌수필』의 무대인 관촌마을은 고층 아파트가 오만하게 산허리를 끊고 대천 앞바다를 내려다 보는 형세로 바뀌어 있었다. 6·25 직후 충청도 관촌마을을 배경으로 충청도 특유의 사투리와 1인칭 독백체 문체로 산업화 과정에서 겪는 소외와 갈등, 농촌의 어려움과 해체 과정을 보여준 그 소설 『관촌수필』. 아니 어쩌면 구수한 된장찌개 맛처럼 한국인들 마음 속에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고향의 원형과도 같았던 그곳이다.

"모닥불은 계속 지펴지는 데다 달빛은 또 그렇게 고와 동네는 밤새껏 매양 황혼녘이었고, 뒷산 등성이 솔수펑 속에서는 어른들 코곪 같은 부엉이 울음이 마루 밑에서 강아지 꿈꾸는 소리처럼 정겹게 들려오고 있었다."

옛 대천시 중심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관촌마을은 이름마저 대천동으로 바뀌었고 작가의 생가터에는 오래 전에 2층 양옥이 올라갔다. 길가에 한 뼘 남짓한 논을 빼면 다닥다닥 집들이 들어서 있다. 돌과 흙을 이겨 쌓은 생가 터의 축담 일부, 그 너머의 낮게 휘어진 소나무와 문전옥답 옆의 은행나무가 옛 기억을 그나마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어째 이리 무식헌지 몰라. 동네 이름을 죄다 대천 1동부터 10동까지 맨들어 놓으면 여기가 어딘지 그걸 어찌 알아보겄어."

마을 초입에 있는 '관촌 마을'비마저 없었더라면 이곳이 그 유명한 소설 『관촌수필』의 무대인지 아닌지 아무도 모를 정도다. 그저 비석에만 "이 곳 관촌마을은 윗갈머리(상관촌)와 아랫갈머리(하관촌) 중 아랫갈머리로서…마을 뒷산은 『관촌수필』에 나오는 부엉재이고 현 농지개량조합이 있는 자리는 왕소나무가 서 있었던 자리이다"라며 그리운 옛 곳을 추억하고 있을 뿐이다.

이틀간에 걸쳐 이뤄진 문학기행에 참가한 이들은 이어 이씨의 소설 『매월당 김시습』의 창작 모티브가 된 김시습 영정을 보러 인근인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의 무량사를 찾아갔다.

'관촌마을'碑로 명맥

토속적 풍경과 능청맞은 사투리를 구사하는 젊은 작가 몇몇을 일컬어 제 2의 이문구라 할 정도로 이씨는 우리말의 향취를 살리고 뽐내는 거의 유일무이한 작가다. 그런데 그의 말은 웬걸 "내 전철을 따르지 말라고…"로 이어진다. 날밤이 새도록 다스려 언어를 익혀야 하는 고된 일인데 그러려면 주인공은 영낙없이 60대 이상의 노인이 되기 십상이니 출판사도 꺼리고 독자들도 안 붙는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농민들이 주로 주인공인데 그 사람들이 소설을 봐? 이렇게 써봐야 사면초가가 아니라 오면초가야"라고 하는 이씨. 어쩌면 토속적 풍경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의 우리들 풍경이 사라지는 게 더 큰 두려움 아니겠는가.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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