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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냈구나… 후배들아 장하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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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온 국민이 감격한 첫승 순간, 누구보다 감회가 새로운 사람들은 월드컵 첫승의 밑거름이 된 선배들이었으리라. 감정을 이기지 못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참을 기다린 사람도 있었다. 누구보다 더 기뻤을 대표팀 선배들, 이들로부터 첫승의 소감을 들어봤다.

▶홍덕영(1954년 스위스 월드컵 골키퍼)

어린 친구들이 너무 잘 했다. TV를 보니 언제 저렇게 실력이 늘었나 기특하기만 하다. 54년에는 경기가 끝난 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가슴이 찢어질 듯 고통스럽기만 했다. 근데 이렇게 잘 할 수 있다니. 부럽기도 하고 나도 또 뛰고 싶기도 하다. 주눅들지 않고 뛰어 이길 수 있었던 것 같다. 계속 잘 해서 다음에도 또 이기길 빈다(홍옹은 병중이어서 길게 얘기할 수 없었다.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간혹 기침을 하며 어눌하게 얘기하면서도 순간순간 후배들을 칭찬할 땐 감격스런 목소리였다).

▶이회택(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감독)

한국인으로서, 축구인으로서 내내 염원한 월드컵 첫승을 이뤄냈다. 선수단, 특히 히딩크 감독에게 감사한다. 내가 맡았던 90년 대표팀이나, 이번 대표팀이나 선수 개개인의 능력은 비슷하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이 전술적 훈련을 통해 한국팀에 조직력을 심어줬다. 선수들도 군소리없이 힘든 훈련을 충실히 소화했다. 예전에 붙어보지 못했던 강팀과의 평가전도 승리의 밑거름이 됐다. 누구와도 한번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언제나 말로만 하던 '한국 축구의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왔다. 이제 한국 축구의 시작이다. 국민들도 차분하게 성원해줄 때다. 미국전·포르투갈전에서도 선전을 기대한다.

▶김호 감독(94년 미국 월드컵 감독)

부산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가까이에서 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보니 나도 가슴이 떨렸다. 그리고 감격스러웠다. 특히 8년 전 나와 한솥밥을 먹었던 홍명보·황선홍 두 노장이 지금도 후배에 뒤지지 않고 뛰는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월드컵 1승은 한국 축구의 역사를 한 단계 도약시킨 역사적인 사건이다. 내가 못한 일들을 해준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돌이켜 보면 94년은 어려움이 많았다. 선수층도 얇았고, 섭씨 30도를 훌쩍 넘는 폭염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때 세계 정상권 선수들과 싸워 2무1패를 기록했던 선배들의 투혼이 지금의 첫승 씨앗이 될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체력훈련의 효과가 분명히 있었다고 보인다. 월드컵 첫승의 기쁨을 단순한 이벤트로 넘기지 않길 바란다. 이제 축구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좋은 재목을 키우는 데 집중할 때다.

▶김종부(86년 멕시코 월드컵 출전)

시차 적응이나 기후 등 예년보다 다소 유리한 조건이라 경기하기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 승리는 단순한 1승이 아니다. 운도 아니다. 난 그간 한국팀이 경기하는 모습을 쭉 지켜보면서 우리가 세계 수준에 근접했음을 피부로 느꼈다. 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첫 골과 첫 승점을 따낸 이후 16년이 걸렸다. 1승을 올리는 데 그런 시간을 들인 것은 우리 축구의 모든 것을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섣불리 1승을 올렸다면 과연 현재와 같은 축구 수준에 도달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이번엔 누가 뭐래도 이변과 파란이 아닌 실력에 의해 승리를 따냈다. 그래서 후배들이 자랑스럽다.

정리=최민우·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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