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運 상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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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그날 이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왠지 경쾌하다. 표정들도 모두 화사하다. 길을 가다 서로 어깨 좀 부딪친들 어떠랴. 그토록 미워하던 사람까지 문득 용서하고 싶어지는 아침, 아직도 가슴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용솟음치는 이 아침에, 우리는 국운(國運) 상승의 기운을 느낀다.

월드컵에서 한번 이겼다고 웬 국운 상승까지? 천만의 말씀. 국운 상승이 뭐 별건가. 4천만, 아니 7천만 민족이 모두 신명이 나서 하는 일마다 즐거우면 무엇인들 못 이룰까. 그게 나라의 기운이 상승하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월드컵이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해 국운 상승을 이끌어냈던 예를 우리는 독일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서독은 당시 32승 무패를 자랑하던 세계최강 헝가리를 3-2로 꺾고 우승했다.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스위스 국경까지 나가 선수들을 맞았다. 패전의 멍에를 쓴 채 절대빈곤에 허덕이던 서독 국민들은 이 '베른의 기적'으로 일거에 자심감을 회복했다. 이를 계기로 다시 일어선 서독 국민은 저 유명한 '라인강의 기적'을 일궈낸다.

74년 제10회 서독 월드컵에서 '카이저(황제)' 베켄바워가 이끈 서독팀은 결승전에서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를 2-1로 이겼다. 2년 전 뮌헨에서 올림픽을 치른 서독의 경제는 이미 유럽 최강의 자리에 올라섰다. 4년 전의 역사적 동·서독 정상회담도 성과를 내기 시작해 이 해 동·서독은 상주대표부를 교환하는 등 통일에의 길로 매진하게 된다.

다시 16년이 지난 90년 7월 8일 서독이 아르헨티나를 1-0으로 이기고 우승했다. 마침 당시 베를린에 있었던 기자는 뻗쳐오르는 독일의 기운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도이칠란트'를 외쳐대는 함성과 독일기(旗)로 거리는 광란의 도가니였다. 바로 일주일 전 화폐를 통합해 사실상 통일을 이룬 독일 국민들에겐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그리고 3개월 뒤인 10월 3일, 드디어 독일 국민들의 20세기 인류 최대의 드라마인 동·서독 통일을 이룩하게 된다. 같은 분단국가였다가 우리보다 먼저 통일을 달성한 독일 국민들에게 월드컵은 이처럼 역사의 고비마다 용기를 주고 단결을 유도한 기폭제였다.

자, 이제는 우리 차례다. 지금 주체 못할 정도로 넘쳐 흐르는 국민 모두의 엔도르핀을 좀더 모으자. 그래서 16강, 아니 8강을 넘어 궁극적으로 통일에의 길로 달려 가자.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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