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야 국민연금 자충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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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제 살 깎아 먹기나 다름없다. 신용불량자들에게 그렇게 돈을 빼주고 나면 여기저기서 불만이 나올 테고… 국민연금의 기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한나라당이 23일 국민연금 불입액을 빼내 신용불량자의 빚을 갚을 수 있도록 하는 '반환 일시금 제도'를 들고 나온 데 대해 국민연금공단 관계자는 이렇게 걱정했다.

365만여명에 이르는 신용불량자의 곤궁한 삶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배드뱅크란 제도도 그런 취지에서 나왔다. 한나라당의 방안은 언뜻 듣기에는 솔깃한 대책임에 틀림없다. "지금 당장 먹고살기 힘든데, 노후가 무슨 소용 있느냐"는 게 핵심 논리다. 이 제도를 시행하면 16만여명의 신불자가 혜택을 볼 것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20~30년 뒤 노후의 마지막 보루이고, 미우나 고우나 의지할 데는 국민연금밖에 없는 대다수 서민 입장에 서서 생각해 봐야 한다. 정부는 1998년 외환위기 직후 서민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연금 보험료 납부액의 80%를 생활자금으로 대출해 준 적이 있다. 그때 24만여명이 평균 330만원(총 7800억원)을 대출받았지만 이중 90%가 돈을 못 갚아 불입액으로 상계 처리했다. 1인당 8년가량의 연금 가입 기간을 까먹어 노후 소득 사각지대에 빠질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래서 7개월간 시행되다 중단됐었다.

신불자 못지않게 돈이 급한 사람도 많다.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는 중환자나 끼니 때우기가 어려운 저소득층도 "왜 우리는 돌려주지 않느냐"고 요구할 것이다. 정상적으로 보험료를 내던 사람도 돈을 내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이런 사태가 오면 국민연금 제도에 대한 불신이 가중돼 제도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선진국.개도국 할 것 없이 반환 일시금 제도를 운영하는 나라가 별로 없다.

아무리 곤궁해도 봄에 종자로 쓸 볍씨에는 손을 대지 않는 법이다. 눈앞의 인기보다 미래를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신성식 정책기획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