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지원 무조건 효과 있다" - 귄터 그라스 기자회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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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99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독일의 귄터 그라스(75)가 29일 오전 서울 남산 독일문화원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했다. 30여 명의 내·외신 신문·방송 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견은 대작가이자 서구 지성계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 그라스의 위상을 실감케 하는 자리였다. 그라스는 회견 내내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여유롭게, 그리고 이리저리 손짓하며 진지하게 답했다.

-한국의 분단과 통일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한국 전쟁이 일어나면서 시작됐어요. 이 전쟁으로 전세계에 냉전 체제가 수립됐죠. 독일의 경우 내전은 없었지만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생기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죠. 한국과 독일의 분단은 유사한 점이 많아요. 한국은 통일 과정에서 독일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독일 통일의 경험에서 한국인에게 권해줄 말씀은.

"빌리 브란트가 70년대 초반 동방정책을 수행하면서 통일을 위한 일이 시작됐어요. 당시 야당인 기독교 민주당은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브란트는 동·서독 교류에 소련의 재가가 필수적이란 걸 알았죠. 그는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이후 폴란드에도 갔어요. 거기서 '독일은 동구권으로 확장하지 않는다'고 국경에 관한 입장을 천명했죠. 그 후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동·서독간의 긴장이 풀렸지요. 이산가족이 만나고 의학과 문화 등의 분야에서 수많은 교류 협정이 체결됐습니다. 고속도로도 같이 만들었죠. 한국인에게 해줄 수 있는 말도 접근을 통해 점진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미국의 협조가 제일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런데 최근 미국의 태도는 남북간 교류에 부정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미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깡패국가'라고 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아요. 미국이 좀더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탈북자가 속출하는 북한을 두고 휴머니즘을 강조한다면 효과가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대북 지원을 두고 남한 내부에선 '일방적 퍼주기'란 논란도 있습니다.

"남한이 북한을 지원하면 그 효과는 무조건 생깁니다. 만약 북한이 망해서 사람들이 우르르 남쪽으로 내려온다고 생각해 봅시다. 비극이에요, 비극. 그런 일을 막는 차원에서도 도와주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현재 분단을 통해 남한보다 북한이 받는 고통이 더 크지 않습니까. 도덕적으로도 북한을 도와줘야 합니다. 그리고 통일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거죠. 또 통일로 가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통일 후의 통합에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서독의 경우 동독을 도와줬어야 할 타이밍을 놓쳤어요. 그러다 보니 통일 후 동독 경제가 파탄난 거죠."

-독일 통일 과정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어떠했습니까.

"이데올로기·정치·군사에선 다른 길을 갔어도 문화 분야에서는 동·서독 교류가 끊이지 않았어요. 자주 만났고 많은 교류를 했죠. 남북한 작가에게도 서로의 문화적 동질성을 끄집어내고 공유하는 움직임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원래 방북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올 10월이면 제가 75세가 됩니다. 젊은 나이도 아니니 이번에 북한 방문이 성사됐더라면 참 좋았겠죠. 그러나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한다면 기꺼이 북한에 갈 것입니다."

-월드컵 전야제(30일)에서 축시를 낭송하시죠.

"60년대에 썼던 짧은 시로 네 줄짜리입니다. 나도 축구를 보며 열광하고 기뻐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에요. 이번 월드컵을 축하하기 위해 제가 그동안 썼던 시 중에서 축구를 소재로 한 이 시를 골랐습니다."

-한국과 독일의 교류를 위한 제언을 부탁드립니다.

"강조하고 싶은 건 번역하는 사람을 더욱 지원하자는 겁니다. 좋은 번역이 다른 나라에 대한 관심을 높입니다. 한국에 와서 내 소설 『게걸음으로 가다』 번역본을 봤어요. 아주 멋지게 편집돼 있습디다. 이 책은 현재 34개국에서 번역하기로 계약돼 있지요. 이번에 한국에서 제일 먼저 출간했습니다."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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