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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부조리극 같다":귄터 그라스, 판문점을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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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판문점(板門店). "해괴망측한 잡물, 사람으로 치면 가슴패기에 난 부스럼 같은 것." 실향민 작가 이호철씨는 1961년 발표한 소설 '판문점'에서 그곳을 이렇게 정의했었다.

"한 편의 부조리극 같다." 한국에 처음 와 하룻밤 자고 일어나자마자 판문점으로 달려간 9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75)는 판문점을 부조리극에 비유했다. 분단이란 악성 바이러스를 한 몸에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남북의 현실을 짚어낸 것이다.

그라스가 내한 이틀째인 28일 판문점을 첫번째 방문지로 삼은 이유는 과거 분단국 독일의 지식인으로서 한국에 대한 관심과 연대의식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방한 전 "북한을 방문해, 나와 남북한 지식인 간에 3자 대담을 나눈 뒤 판문점을 통해서 남쪽으로 내려오고 싶다"고 거듭 말했었다. 이 계획이 무산되자 대신 그는 동독 출신의 시인 우베 콜베, 우베 슈멜터 주한 독일문화원장, 중앙대 김누리 교수 등과 함께 판문점을 찾은 것이다.

곳곳서 통일前 독일 모습 회상

59년 『양철북』을 발표하며 일약 대작가로 떠오른 그는 그 작품에서 나치즘 창궐의 배후에 독일 대중의 마비된 양심과 무지와 순응이 있었음을 고발했었다. 독일인 작가이면서도 자국민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 그는 이렇듯 부조리한 현실을 끊임없이 비판하며 참여적 지식인의 한 모델을 만들었다. 특히 독일 통일 문제에 관한 한 그는 성급한 통일에 절대 반대 입장을 공표해 왔었다.

그라스는 코끝에 걸쳐진 안경 너머로 한국 분단의 최전선을 상징하는 여러 건물과 병사들의 긴장된 모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는 발언을 하기 보다는 설명을 충실히 듣고 궁금한 점을 묻는 등 이곳의 현실 파악에 주력하는 모습이었다.

판문점 첫 방문지는 우리측 자유의 집과 북측 판문각, 그러니까 군사분계선상에 있는 군사정전위 본회의장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우리측 군인이 건물 모서리를 기준으로 몸을 반만 내밀고 경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상대편을 살피면서 돌발 상황시에 몸을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통일을 먼저 경험한 나라의 작가로서 한마디 해달라"는 김누리 교수의 질문에 그라스는 '좋은 통일'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아시아는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서로 체면이 손상되지 않는 걸 중요시하죠. 그런데 독일 통일은 동독의 체면을 구기게 했어요. 성급했던 거죠. 급작스런 통일로 독일에 현실의 베를린 장벽은 사라졌지만 동과 서 사이에 의식의 장벽이 생겼습니다. 천천히 달려가야 해요, 좋은 통일로. 한국도 이걸 유념해야 합니다. 서로의 체면을 존중해 주는 방향으로 가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이런 대화를 나눌 때 수십 명의 관광객들이 정전위 회담장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라스는 "이런 장소에서 관광이 이뤄진다는게 재미있고 아이러니하다"며 "베를린 장벽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 왔었고 외국 정치인도 꼭 다녀가곤 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판문점 이곳 저곳에서 통일 전 독일의 모습을 연상하는 듯 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보고는 "베를린의 '그뤼니케 브뤼케(다리)'같다"라고 했고 방명록에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방문. 분단됐던 시절을 되돌아 보게 했다"라고 썼다.

관광객 보며 "아이러니"

그는 북한쪽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제 3초소에도 올라갔다. 초여름 날씨였지만 하늘은 유난히 맑았고 바람도 시원했다. 북한측 선전마을인 기장동이 한 눈에 들어왔고 1백60m 높이의 게양대에서 인공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일대의 목가적 풍광은 정치·군사적인 첨예한 대치를 비웃기라도 하듯 푸르름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푸르름의 밀도는 북쪽으로 향할수록 엷여져갔고 대신 흙빛이 짙어졌다. 그라스도 세심히 관찰했다. 그는 3초소에서 "분단이 부조리하니 자연도 부조리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판문점=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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