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5> 축구의 국제정치학-둥근 축구공처럼 세계를 둥글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축구공은 둥글다'.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울 때 쓰는 말이다. 선수들의 실력이 물론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실력이 엇비슷할 때에는 공이 튀는 방향이 경기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도 있다. 축구공은 둥글기 때문에 세계와 그 모습을 같이한다. 축구공을 지구의(地球儀)로 생각해 보라. 모든 국가·민족·계급·인종·종교·성(性)·세대가 한데 모여 있는 것이 축구공이다. 우리는 축구공에서 경쟁보다 참여를 통한 인류의 화해와 조화를 모색할 수 있다.

축 구는 세계적으로 가장 대중적인 운동이다. 어느 대륙을 가더라도, 잘사는 나라 못사는 나라를 불문하고, 축구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축구는 조그만 공간만 있으면 남녀노소 불구하고 장비에 구애 없이 돈 안들이고 손쉽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지구적 스포츠로서 축구는 부가가치가 매우 높은 문화상품이다. 월드컵은 올림픽보다 큰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월드컵은 상업주의와 국가주의로 멍들어 있다. 스포츠 광고와 기업 마케팅 전략이 결합함으로써 월드컵은 일종의 '장사판'이 되고 있다. 월드컵에서의 경연(競演)이 국력 과시를 위한 싸움판으로 전락하고 있다. 모든 나라가 월드컵 본선에서 자국을 선전하기 위해 많은 돈과 인력을 투자한다.

과학기술 혁명에 따른 교통·통신수단의 발달과 TV를 통한 위성중계의 확대가 스포츠의 지구화를 가져오고 있다. 게임의 규칙과 절차, 대회의 운영과 조직에서 표준화가 진행된다.축구는 지구화된 스포츠로서 가장 대표적인 보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축구는 정치적으로 활용될 소지가 크다. 축구는 특히 다른 운동경기보다 강한 '전투 양식(stylized battle)'을 취함으로써 관중을 집합적으로 흥분시키는 마력도 갖고 있다.

월드컵이 본격화하면서 많은 나라가 자국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축구에 민족주의 감정을 불어넣기 시작했다.이러한 축구에 의한 스포츠 민족주의는 국가(國歌)나 국기(國旗)와 같은 의례를 통해 대내적으로는 다양한 인종의 결합,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해외 동포들의 자국민으로의 통합을 가져오는데 일조하고 있다. 국제대회에서의 성적이 마치 국력의 척도로 여겨질 정도다.

국민은 축구를 통해 '상상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선수라는 '대리 전사'를 통해 국력 과시를 위한 '총성없는 전쟁'에 참여한다.

지난 70여년간 월드컵 우승은 공교롭게도 유럽과 남미에 각기 여덟번씩 돌아갔는데, 이것은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격차를 축구를 통한 우월감의 쟁투로 옮겨 놓은 듯하다. 서구적 근대성의 산물로서 축구는 식민지 시대에 유럽인들에 의해 라틴 아메리카로 이식되면서 유럽과 남미의 대칭 구도를 가져왔다. 유럽에서의 영국·독일·프랑스의 자존심 싸움이라든가, 남미에서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의 치열한 라이벌 의식은 잘 알려져 있다.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브라질에는 펠레가 있다'는 얘기에서 현대 축구의 세계적 인기를 짐작한다. 단일 종목으로서 월드컵은 최대의 국제적 메가 이벤트(mega-event)다.

월드컵은 자본주의의 세계시장을 통해 축구를 상품화해왔다. 올림픽이 불과 2주 동안 치러지는 잡다한 품목을 내건 수퍼마켓과 같은 시장이라면, 월드컵은 단일 품종으로 무려 한달 동안 열리는 전문백화점과 같은 시장이다.
광고수입·후원기업·상품판매·재정지출·참여국가·선수 숫자·관중 동원·입장권 수입 등에서 월드컵은 다른 모든 스포츠 선수권대회들을 압도한다.

자본과 언론의 합작품으로서 월드컵은 '관중 스포츠(spectator sports)'로서 최고의 매력을 구사한다.

TV가 축구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스타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연출되는 인간 드라마는 사람들에게 흥분과 감격을 주면서 후원 기업의 이미지를 강하게 각인시켜 준다. 국제화된 프로스포츠로서 월드컵은 돈과 미디어가 만들어 낸 메가 이벤트인 셈이다.

물론 이 배후에는 국가가 자리잡고 있다. 월드컵의 또 다른 연출자로서 오늘의 국가들은 본선에 참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월드컵 본선에 나가느냐, 못 나가느냐는 단순히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를 넘어서 있다. 월드컵 본선 진출은 범국가적 사업이다.

많 은 나라의 정부가 자국 내의 갈등을 봉합하거나 통합을 도모하기 위해 월드컵을 적극 활용해 왔다. 시민 학살을 무마하려 한 1970년의 멕시코, 양민 살해를 호도하려 한 78년의 아르헨티나, 그리고 장사와 문화를 결합한 98년의 프랑스가 좋은 예다.

국제축구연맹은 유엔보다 많은 2백4개국을 회원국으로 거느리고 있는 가장 막강한 민간분야의 국제기구다. 그것은 월드컵이라는 세계 최고 권위의 선수권대회를 자체의 규범과 제도에 의해 4년마다 주최하면서, 자체적인 조직의 이해 관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다. 축구라는 지구적인 스포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데 월드컵이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국제축구연맹은 비밀주의에 입각해 흥행성과 수익성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스포츠의 제도화가 문화산업의 출범을 가져왔다면, 국제축구연맹은 축구라는 상품을 월드컵이라는 시장을 통해 판매하는 거간이라 할 수 있다. 스포츠와 기업은 후원기업 제도를 통해 서로의 이해를 수렴한다. 스포츠가 재정지원을 받는다면, 기업은 광고효과를 얻는다. 이러한 후원기업 제도가 스포츠의 변질을 가져오는 것은 물론이다. 월드컵은 이미 '기업들의 게임'이 되고 있다.

70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등장한 TV중계가 지구적 스포츠로서 축구의 상품성을 더욱 높여왔다. 후원기업이 얻을 수 있는 광고효과가 극대화한 상황에서 월드컵은 일종의 '돈이 남는 장사'를 할 수 있었다. 94년 미국 월드컵조직위는 약 2억달러의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98년 프랑스 월드컵조직위는 3억달러의 수입을 올린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축구의 상품화는 프로축구의 이상비대를 가져오고 있다. 프로구단들이 국가대표팀보다 더 힘을 갖게 됐고, 그 중에서도 자산규모가 큰 것들만이 살아남고 있다.

이들은 국가적 경계를 넘어서 선수를 확충하고 구단을 운영함으로써 일종의 초국가적인 성격마저 띠고 있다. 특히 스포츠 미디어 산업을 장악하고 있는 다국적 자본가들에 의해 축구 구단이 운영됨으로써 축구계에서 상업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됐다. 이제 국가나 지방을 연고로 활동하면서 공동체적 역할을 수행했던 종래의 축구 의미는 퇴색하고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