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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선과 최규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코리아게이트는 70년대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 한편으로는 유신체제에 대한 미국의 반대를 완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닉슨 정부의 미군 철수계획을 막기 위한 정권차원의 엽기적인 의회로비 스캔들이다. 그 중심인물 박동선은 지금도 로비스트의 대명사로 통한다.

김홍걸사건을 보고 박동선이 로비스트의 조건에 대해서 한마디 했다. "해당분야에 대한 전문지식과 고급인맥과 침묵할 때 침묵하고 신의를 지키는 인간 됨됨이가 중요해요."(매일경제신문 5월 1일 인터뷰)

로비스트 박동선의 순발력은 로비자금을 한국 정부에서 받지 않고 현지조달한데서 드러났다. 70년대 중반이면 미국이 군사차관을 5천만달러만 늘려도 한국 신문에 대서특필될 만큼 달러가 궁핍하던 때였다.

그당시 미국은 남아도는 쌀과 밀의 처리로 고민했다. 특히 캘리포니아와 루이지애나의 쌀 산지(産地)가 선거구인 하원의원들의 정치생명은 잉여농산물의 처리에 크게 좌우됐다. 미국은 PL(公法)480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로비스트의 탁월한 재능

미국이 한국 같은 나라에 장기저리(長期低利)의 PL480 기금을 원조하면 한국은 그 돈으로 미국의 쌀과 밀을 수입하는 것이다.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한국이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쌀을 수입하지 않는다는 합의에 묶여있었던 것도 그래서다.

박동선은 우선 그의 미국 내 인맥을 필요로 하는 한국정부로부터 미국 쌀 수입 대리인 지정을 받은 뒤 한국에 쌀을 수출하는 독점적인 권리를 따려고 피나는 경쟁을 벌이던 곡물 메이저들인 코넬과 콘티넨털간에 싸움을 붙여 결국 코넬의 편에 서면서 자신이 받을 커미션을 그때까지의 t당 50센트에서 95센트로 대폭 올렸다.

그렇게 해서 박동선은 돈방석에 앉게 되고 그 돈의 일부를 의회에 뿌려 한국의 유신정권에 대한 비판을 견딜만한 수준에 묶어두고 주한미군 철수론자들의 입을 막는데 주력했다. 잉여농산물 처리의 메커니즘을 꿰뚫는 지식이 바로 그가 말하는 로비스트의 조건의 하나인 '해당분야의 전문지식'이겠다. 중학시절 미국에 건너가 쌓은 유려(麗)한 영어실력과 명문가의 아들·딸들이 많이 다니는 조지타운대학을 다니면서 엮은 '고급인맥'이 그에게 날개를 달았다.

최규선의 고급인맥 만들기는 80년대 위스콘신대학 유학시절 야인(野人)이던 김대중(金大中)을, 그리고 90년대 버클리 유학 때 마이클 잭슨을 만나는데서 시작됐다. 잭슨과의 교유(交遊)는 뉴욕 월가의 큰손 조지 소로스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억만장자 왈리드왕자와의 관계로 이어졌다. 소로스가 한국에 와서 김대중 당선자를 만나고 왈리드가 대우에 1억5천만달러, 현대에 5천만달러를 투자한 것은 최규선의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추진력 힘이었다.

박동선과 최규선은 외국인을 상대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거기서 끝난다. 박동선이 장거리 선수라면 최규선은 단거리 선수다. 박동선의 미국 인맥이 오랜 사람사귀기의 축적의 산물이라면 최규선의 그것은 순식간에 찾아온 행운 같다.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점

그러나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는 박동선이 미국 의회를 상대로 말썽많은 로비를 한데 반해서 최규선은 김대중정부 초기를 제외하고는 로비스트 또는 브로커 활동을 국내에서 정부관리들과 기업을 상대로 벌였다는 것이다. 로비의 최소한의 명분도 유신정권 지지 및 주한미군철수 저지라는 정치적인 것과 자신을 위한 돈벌이로 갈린다.

외환위기 때 金대통령은 최규선이 성사시킨 몇건의 놀라운 성공사례를 보고 그를 그만 과대평가하고 말았다. 30대 후반의 젊은이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권세와 돈이 그를 덮쳤다. 그는 침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나서고 싶었을 것이다. 나중에 金대통령은 주위의 건의에 따라 그를 멀리 했지만 그것은 호가호위(狐假虎威)에 빠른 최규선이 '비리의 축'의 기반을 구축한 뒤다.

金대통령의 입장에서 최규선은 신의를 저버렸다. 신의를 저버린 게 최규선의 인간성의 문제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金대통령 일가에게는 비극이지만 권력 주변의 비리 청소를 위해서는 얼마나 고마운 인간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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