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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젠 '비싼' 나라가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지난해 9월 서울로 발령받아 온 다마키 다다시(玉置直司)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 지국장은 "서울 생활비가 도쿄(東京)보다 더 비싸다"고 말한다. 교통비만 서울이 좀 쌀 뿐, 집세며 가전제품·음식 값 등은 모두 도쿄가 서울보다 싸다는 것이다.

일본이 더 이상 '비싼 나라'가 아니다?

기존의 상식을 뒤집는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취재팀은 다음과 같은 도쿄의 생활물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요즘 환율로 1엔은 약 10원이다. 그러나 서울·도쿄를 자주 오가는 사람들은 보통 1엔을 3원으로 쳐서 싸고 안싸고를 가늠한다. 이를테면 '체감환율'인 셈이다.)

#규동(牛井·쇠고기덮밥) 체인점 요시노야(吉野家):규동 곱배기 2백90엔

#대형 유통그룹 다이에(大榮)가 긴자(銀座)에서 운영 중인 캐주얼 의류점:면 점퍼 9백80엔

#야후 저팬의 ADSL(비대칭디지털가입자회선)서비스 이용료:한달 2천6백19엔

#메구로(目黑)의 전자제품 매장:KDDI의 휴대전화 단말기(속도 1백44kbps+컬러 액정화면) 1엔

#신주쿠(新宿) 주택가 수퍼마켓:고등어 마리당 2백50엔, 설탕 1㎏ 1백70엔

#중산층 거주지역 나카이케가미(中池上):25평형 신형 맨션의 월세 14만엔(보증금·사례금 56만엔 별도)

한국보다 크게 싸진 않더라도 결코 비싸다고 할 수 없는 가격대다.

살인적이라던 일본의 생활물가가 어떻게 이런 수준까지 떨어졌을까. 원인은 경쟁·규제완화·개방으로 요약된다.

가장 큰 요인은 역시 경쟁이다. 10년 불황 탓에 가뜩이나 절약이 몸에 밴 일본 소비자들이 지갑을 꼭꼭 여미자 업체마다 살아남기 위해 가격 파괴에 나섰다.

일본인 세명 중 두명 꼴로 갖고 있는 휴대전화만 해도 갓 나온 기종은 1만~3만엔씩 하지만 한달만 지나면 5천엔 이하로, 심지어 1엔까지 떨어진다.

1위 업체인 NTT도코모에 맞서기 위해 경쟁업체들이 같은 성능 제품을 1만엔 이상 싼 값에 내놓는 데다 한국과 달리 보조금을 판매점에 지급하기 때문이다.

일본 정보통신(IT) 관계자들이 한국보다 더 싸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는 ADSL 서비스 역시 정부가 공기업인 NTT의 독점을 풀고 경쟁체제를 허용하면서 월 이용료가 절반 이하인 2천~3천엔대로 떨어졌다.

소비자들은 한술 더 뜬다.

"업체·상점별로 잘 비교해보지 않으면 똑같은 물건을 다른 사람보다 비싸게 사기 일쑤다. 손해 안보려면 수시로 가격 비교 사이트에 들어가보는 게 최고다."

프리랜서 번역가 사카히라 나오미(坂平直美·36)는 '가카쿠(價格)코무'(www.kakaku.com) 예찬론자다. 이 사이트에선 PC·가전제품부터 자동차보험·명품에 이르기까지 7백여개 상점들이 시시각각 고쳐 다는 제품값이 실시간으로 뜬다.

가장 싼 제품임을 표시하는 파란색 '사이야스(最安)' 마크가 분 단위로 이쪽저쪽 옮겨다닌다. 일본 언론이 '디플레를 극장화(劇場化)했다'고 평가하는 이 사이트는 요즘 한달에 2천만회의 페이지뷰를 기록한다.

과거 '규제 왕국'으로 불렸던 일본.

하지만 지난 10년새 특유의 아집을 많이도 허물어뜨렸다.

규동 체인업체들은 지난해 이후 줄줄이 규동 값을 기존의 절반인 2백엔대로 내렸다. 외식업에 대한 여신·점포설립 규제가 대폭 풀리자 벌어진 일이다.

'메이드 인 저팬'에 대한 자부심이 유별난 일본인들도 이제는 개방의 혜택을 생활 곳곳에서 누리고 있다.

야마자와 이페이(山澤逸平)아시아경제연구소장은 "중국에 진출한 일본기업 제품을 재수입하는 경우도 많고, 어쨌든 수입 확대가 생활물가 하락의 한 원인"이라고 말한다.

가장 대표적 경우가 저가 의류 돌풍을 일으킨 유니클로.

유니클로는 1996년 중국에 생산기반을 갖추고서부터 1천엔 이하의 티셔츠를 내놓기 시작했다. 여기다 도·소매 재고를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POS(Point of Sales) 등 IT기술을 접목해 비용을 더 떨어뜨리면서 의류업계의 피나는 가격인하 경쟁을 부채질했다.

일본의 의식주 가격은 이렇게 떨어졌고 또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가격 하락의 단맛을 만끽하는 동안 일본 기업들은 경쟁에,개방에 치여 죽을 맛이다.

일본인 세명 중 한명 꼴로 자기 회사 티셔츠를 입혔다는 유니클로만 해도 다이에 등 타업체들까지 가격파괴에 동참하면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매출이 감소세로 돌아섰다.

출혈 경쟁을 벌이고 있는 외식업계에서도 문을 닫는 업체가 속출,모리나가(森永)제과는 지난해 6월 말 외식 관련 자회사를 청산했다.

"최근에는 판매 부진으로 도산하는 이른바 '불황형' 도산이 전체 도산기업의 4분의3에 달한다. 힘과 실력이 달리는 기업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구마가이 가쓰유키(熊谷勝行)제국데이터뱅크 정보부장의 말처럼 일본의 가격하락은 경쟁력 없는 기업을 가차없이 솎아내고 있다.

후원:미래에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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