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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囚人번호 3370'권노갑 식사도 제대로 안하며 결백 주장 사람들은 "더 큰 잘못 있다" 못들은 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권노갑. 그에겐 결벽증이 있다. 하루에도 십수번 손을 씻는다. 음식점에 들어가도 주방부터 살핀다. 지저분하면 차라리 굶고 만다. 이유가 있다. 중학교 다닐 때였다. 권투선수인 그는 매일 로드워크를 했다. 하루는 정신없이 뛰다가 누군가와 부딪쳤다. 그런데 함께 뒹군 사람이 나병환자였다. 그때부터 씻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나 그런 결벽증도 DJ 앞에선 맥을 못췄다. 언젠가 DJ와 식사를 할 때였다. 느닷없이 DJ가 상추쌈을 만들어 건넸다. 남이 만든 쌈을 먹어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먹었다 한다.

그런 모습은 그의 정치생활에도 투영된다. 한보사건 때의 일이다. 그는 하얏트호텔 룸에서 돈가방을 건네받았다. 그러나 방을 나서다 호텔 룸서비스 직원에게 들켰다. 그의 결벽증은 그로 하여금 돈가방을 호텔 빈방에 두고 나오게 했다. 그 돈은 한밤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다시 전달됐다. 그러나 검찰수사가 시작되자 그는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자기 입으로 한보 돈 1억5천만원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문제가 DJ로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구속됐다. 5년 전 일이다.

그런 그가 또 구속됐다. 5천만원을 덥석 받았다는 혐의다. 그것도 김은성 국정원차장이 들고 온 진승현의 돈을 말이다. 사실이라면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의 권세가 평생의 결벽증마저 무뎌지게 한 것일까. 그러나 權씨는 부인하고 있다.

그는 검찰 출두 전 측근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민주당 이훈평 의원이 전해줬다.

우선 김은성이 權씨집을 찾은 이유다. 그것은 DJ의 지시 때문이라고 했다. 바로 전날 金차장은 DJ를 만났다. 그는 權씨 특보 최규선과 김홍걸에 관한 나쁜 것을 보고했다. 그러자 DJ는 "노갑이에게도 그 얘기를 해주라"고 했다. 그래서 다음날 자기집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집을 몰라 국정원 직원과 함께 왔다. 따라서 돈을 건넬 자리가 아니었단 주장이다.

權씨는 이런 말도 했다 한다.

"(YS 시절)안기부장이 국회 정보위원한테 명절 때 주는 떡값 3백도 안받은 나다."

어찌됐든 權씨 진영의 반발은 대단했다. 음모설이 바로 나왔다. 김홍걸 희석용이란 것이었다. 모종의 대응이 예고됐다. 한판 싸움이라도 벌어질 것 같았다. 한나라당 하순봉 의원도 "그 정도 혐의로 구속시킨 것은 홍걸이 물타기의 의심이 간다"고 했다.

그러나 홍걸이 물타기는 아닌 것 같다. 그 효과가 없다. 홍걸 문제는 계속되고 있다. 오히려 더 커져 있다.

그러다보니 권노갑 물타기란 얘기도 돈다. 가벼운 비리로 큰 비리를 감춰준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의 주장이다. 민주당에도 그런 시각이 있다. 지도부 일부조차 그런 말을 한다. 그러나 근거는 없다. 權씨를 궁지로 몰자는 의도도 있다.

權씨는 지금 서울구치소에 있다. 3370이란 번호표를 가슴에 달고 있다. 식사를 거의 안한다고 한다. 얼굴도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억울함 때문이란다. 여전히 결백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주장을 믿어주지 않는다. 설득력이 있고 없고는 별개다. 믿어주기 싫은 거다. 막연하지만 더 큰 잘못이 있다고 보는 거다. 그래서 못들은 체하는 거다. 그게 민심이다.

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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