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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성 존중이 지나친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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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흥미의 유혹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미국 언론의 정통 뉴스에서도 이런 모습은 마찬가지다. 두어 달 전 워싱턴 지역에서 한 여대생이 살해당한 채로 발견됐을 때 이곳 신문과 방송은 수사 초기 단계부터 일제히 용의자의 얼굴을 공개했다. 지역 신문들은 경찰의 도움을 받아 한 달에 한번 꼴로 어느 길거리에서 어떤 범죄가 발생했는지 상세하게 알려 준다.

한국에선 최근 들어서야 여아 성폭행범 등 일부 흉악범에 대한 실명과 얼굴 공개가 시도되고 있다. 이에 앞장선 중앙일보는 가해자의 인권보다 공익에 충실해야 한다는 판단, 국민의 알 권리 충족과 유사범죄 예방효과를 그 이유로 내세웠다.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다고 봤는지 이후 경찰이 직접 중요 피의자의 사진을 공개하는 일까지 이어졌다. 미국 방식이 옳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미국 사회와 비교해 볼 때 우리 사회의 익명성(匿名性) 추구와 그에 대한 옹호가 지나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더구나 그 익명성이 건전한 개인 생활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지난 지방선거 때 전화 여론조사가 틀리고 출구조사가 정확했던 이유 중 하나로 익명성의 보장 여부를 지적하는 시각이 있다. 무기명 투표와 유사한 출구조사와 달리 전화번호가 노출되는 여론조사에 부담을 느끼는 유권자가 여전히 있다는 것이다. 386 세대를 지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를 들으면서 자란 그 이후 세대까지 ‘빅 브러더’의 존재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우리 사회에 불행한 일이다. 그 어느 세대보다 사회의 속박과 간섭을 싫어하는 그들의 취향대로 살 수 있도록 익명성은 보장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명의 바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각종 진위 논란이 형사 사건으로 이어지고, 대부분 초등학생까지 포함된 젊은 세대들의 무책임에서 비롯됐다는 결과물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느낌이 드는 것은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백해무익(百害無益)한 논란의 해결을 위해 우리 사회가 지불해야 할 비용이 너무 크고 아깝다.

특파원 업무상 인터넷에서 외국 언론의 보도와 그에 딸린 댓글들을 살펴볼 때가 많다. 지금껏 어떤 논쟁적인 글에서도 우리 사회처럼 독설과 비아냥, 음모적 시각이 가득한 댓글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나는 익명성의 폐해는 제쳐두고 그 존중만이 선진화의 방향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두렵다. 문화부 장관이, 인기 연예인이 자신의 사생활 여부를 놓고 고소하는 나라, 꼭 그들만 탓할 일이 아니다.

김정욱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