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우면 火傷 멀면 凍傷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초우량 기업 포스코가 구설에 휘말리고 있다. 회장이 대통령의 셋째 아들을 만났고 계열사를 통해 타이거풀스 주식을 고가로 매입했다는 것이다.

포스코 회장이 대통령의 아들을 못만날 이유는 없다. 주식매입이 고가냐 아니냐 하는 것도 미래가치 산정 등 따지기에 따라 결론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의 포스코 사건은 우리 대기업이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포스코 오너 있었더라면

첫째, 포스코에 주인이 있었더라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예컨대 대통령의 아들이 삼성전자에 비슷한 부탁을 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그 차이를 잘 알 수 있다. 포스코는 민영화됐지만 아직 공기업 비슷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청와대든 정치권이든 압력을 행사하면 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포스코의 사외이사제도 등 지배구조는 모범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지배구조가 아무리 훌륭해도 정치적 압력을 받을 틈새는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번에 드러났다.

둘째, 대기업과 정치권의 관계설정 문제다. 국민의 정부 초기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대통령에게 고위 관료들의 무능을 지적했다가 큰 곤욕을 치렀다. 당장 회사채와 어음의 발행한도가 축소된 것이다.

재벌그룹이 아닌 포스코의 경우는 어떤가. 민영화된 마당에 정치권이나 정부가 포스코를 키워줄 수는 없다. 포스코는 국내에 경쟁자가 없고 오로지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이나 정부는 포스코에 해코지를 할 수 있는 힘은 있다. 과거 공기업 시절에는 감사원을 통해 특별감사를 할 수 있었고 민영화된 지금도 국세청을 동원해 조사를 해 볼 수 있다.

이것이 현실이라면 대통령의 부인이 "우리 아들을 만나달라"고 했을 때 거절할 수 있을까. 또 거절하는 것이 꼭 현명한 일인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청와대의 주장대로, 이희호 여사가 개입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언론 보도를 보면 최규선씨는 조지 소로스와 마이클 잭슨을 불러올 수 있는 실력자다. 이런 사람이 만나자는데 굳이 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는 한국이다. 일이 잘못되면 다 덮어써야 하는 것이 한국적 풍토다. 잘 알려진 대로 포스코는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기업이다. 경영은 투명하고 사외이사제도는 모범적이며 지배구조는 선진적이다. 유상부 회장 취임 이후 매년 엄청난 이익을 내왔다.

그러나 정치적 구설에 휘말리면 어떤 장점도 희석돼버리는 게 한국의 기업풍토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한 빌 게이츠 회장은 비즈니스와 관련해 아직까지 정부 관료를 만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홍콩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의 한 최고경영자는 홍콩에서 사업하는 데 어려운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날씨가 좀 더운 편"이라고 대답했다.

脫정치 경영환경 조성을

우리 기업들은 사사건건 정부의 의중을 살펴야 하고 미운 털이 박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포스코의 경우 주주의 60%가 외국인이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그들이 포스코나 우리 대기업을 어떻게 평가할는지 궁금하다. 이번 사건이 앞으로 공기업 민영화의 방식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관심거리다. 주인있는 민영화가 거론될 수도 있다.

우리 기업들은 실적에 비해 주가가 낮아 저평가되고 있다. 지배구조와 정치적 리스크 때문에 그렇다. 이런 현상을 '코리아 디스카운트'라고 부른다.

포스코의 경우를 보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범은 정치권이다. 지배구조를 아무리 선진화해도 정치권이 기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시장이라면 기업은 항상 위험에 노출돼 있다. 초우량 기업은 경영자의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이런 풍토에서 정치권에 너무 가까이 가면 화상을 입을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너무 멀어지면 동상에 걸리게 된다. 기업의 최고경영자는 화상을 입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두되 동상에 걸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는 유지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