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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프로젝트 파이낸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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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회장이 해냈다는 그 유명한 조선소 짓기. 이제는 전설이 되다시피 한 성공담에는 ‘프로젝트 파이낸싱’의 마법이 숨어 있다. 전설은 이렇게 전한다.

정주영은 조선소를 지을 돈이 없었다. 1971년 영국 바클레이즈은행을 찾아간다.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계약서를 가져오면 대출해 주겠다.” 정주영은 그 말을 믿고 세계를 누볐다. “수주계약서로 돈을 빌려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겠다.” 마침내 그리스 리바노스사가 원유운반선 2척을 발주했다. 정주영은 그걸 밑천 삼아 울산 조선소를 짓는다.

그 무렵이라면 이건 분명 기적이다. 무에서 유가 창조됐다. 하지만 이 시대의 눈으로 보면 평범한 프로젝트 파이낸싱일 뿐이다. 건설사가 사무실을 지어 팔겠다고 하니 금융사는 분양대금을 바라보고 돈을 빌려준 것이고, 기업은 필요한 사무실이 만들어진다니 계약금을 내고 분양받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법이다. 이것이 왜 기적이냐는 게 요즘 금융공학도의 항변이다.

당시 정주영의 기적을 만들어준 그리스. 지금 곳간이 거덜 난 이 나라를 향해 일부 유럽 정치인들은 파르테논 신전 같은 고대 유적을 팔라고 요구한다. 한국이 똑같은 재정위기를 겪는다면 이런 요구에 시달릴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를 팔아라.” 허튼소리 같지만 2004년에 정부가 실제 검토한 적도 있다. 유적 관람료든, 고속도로 통행료든 미래의 수입이 있다면, 정주영처럼 그걸 담보 삼아 대출을 받거나, 요금 징수권을 아예 통째로 팔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고대 유적이나 경부고속도로를 파는 건 돈만의 문제일 수 없다. 뭘 짓고 세우는 데 쓰이는 프로젝트 파이낸싱도 아니다. 그렇지만 원리는 거기서 거기다. 둘 다 시간의 가치를 다루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현재와 미래, 두 시점 사이에 도사린 위험을 예측·관리하는 것이 현대금융의 핵이다. 옛날보다 훨씬 변화무쌍한 세상이니 그 기술은 더욱더 정교해야 한다. 요즘 저축은행들이 허우적대고 있다. 건설 사업에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해줬다 물린 것이다. 예고된 폭탄인데도 감독당국은 이를 제대로 규율하지 못했다. 정부는 뒤늦게 공적자금을 투입하겠다며 약방문을 내놨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정주영의 개척 정신만 평가하고, 40년 전 그의 성공을 예측한 은행과 선주의 지혜는 못 본 척한 것은 아닐는지. 그들 또한 주먹구구였을지 몰라도 말이다.

허귀식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