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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32>제101화 우리서로섬기며살자 : 31.뱃길로부산항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1959년 12월 12일 밤 8시, 19일간의 항해 끝에 나와 트루디는 부산에 도착했다. 우리는 곧바로 여관을 찾아 잠을 청했다. 이튿날 부산 시내에 나가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크게 달라지지 않은 시내를 둘러보다가 경찰서에 들렀다. 귀국신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신문기자를 만났는데, 우리가 신기해 보였던지 취재를 하겠다고 나섰다. 훗날 트루디가 미국의 부모님께 보낸 편지도 미시간주 그린빌신문에 실렸는데, 우리는 어딜 가나 주목받는 부부였다.

다시 배를 타고 가족들이 마중나오기로 한 인천항으로 향했다. 8년 만에 가족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었다. 부두에는 어머니를 비롯해 형님들과 형수님,조카들, 팀선교회 선교사들까지 10여명이 나와 있었다. 어머니는 떠날 때보다 훨씬 늙으셨지만 정정한 모습으로 나를 맞았다. 어머니는 8년 만에 돌아온 아들을 보고 또 보고, 너무나 좋아하셨다. 가족들은 어른이 되어 돌아온 내가 낯설었던지 어색해했다.

어머니는 내 얼굴을 쓰다듬으시다가 뒤에 서있던 트루디를 발견하고는 "네가 막내 새애기구나"하면서 얼싸안았다. 가족들이 트루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었는데 어머니가 환영해주시니 일단 마음이 놓였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나를 기다리시던 어머니는 노랑머리 여자 선교사들을 보고 형수에게 "장환이 색시도 저렇게 생겼을까?"하면서 걱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갈색 눈에 갈색머리의 아담한 며느리가 나타나자 어머니는 너무도 반가왔던 것이다.

트루디는 모든 게 신기한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트루디가 부모님께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그녀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19일간의 항해 끝에 부산에 도착했어요. 어젯밤 8시께 항구에 내렸는데, 그 도시는 불빛이 휘황찬란해 마치 샌프란시스코에 온 것 같았어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마치 햇빛이 다른 그림을 그려 놓은 것처럼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그 아름답던 불빛은 모두 오두막이었고 산들은 헐벗었어요. 우리는 배를 타고 다시 인천으로 가서 낡아빠진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의 가난을 부모님께서는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아내가 한국에 오기 전에 가본 나라라곤 캐나다와 멕시코가 전부였다.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었기때문에 오히려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냥 미국과 같은 줄 알고 왔지만 실망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내의 오빠, 즉 나의 처남 롤랜드 스티븐슨은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의료선교를 하는 의사였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황폐한 아프리카로 떠난 오빠보다 자신은 훨씬 행운아라는 아내의 말은 나를 감격시켰다. 남편의 고국으로 왔는데 뭐 걱정할 게 있느냐는 식이었다.

나의 아내를 한번이라도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 앞에서 아내 칭찬을 한다.

"사모님 정말 훌륭해요. 목사님보다 사모님을 보고 더 감탄을 하게 되요. 정말 결혼 잘 하신 것 같아요."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얘기다. 나도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 집 사람 자랑하려면 책 한 권으로 모자라요"라고 응수한다. 아내 자랑하는 사람은 팔불출이라지만 앞으로 아내 자랑은 자주 나올 것 같다.

고향 가는 길은 8년 전 한국을 떠날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특히 수원에 들어서자 시간이 정체된 듯했다. 나는 고향길을 달리면서 할 일이 많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에서 주말마다 갔던 시골을 떠올리며 내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이 자리까지 왔으니, 나도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헌신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가족의 전도였다.

초가집에 도착했더니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트루디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재빨리 트루디를 안으로 데려가 한복으로 갈아 입혔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내에게 국수를 먹으라고 재촉했다. 아내는 국수국물에 떠 있는 멸치를 보고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다가 곧 정신을 차린 듯, 밝게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이제 한국에서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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