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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곳간 채워줄 '책 리조트' 만들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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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몇 년 전 좀 독특한 여행을 했다. 잔뜩 피폐해진 마음과 복잡해진 머리를 치유하고 정리하기 위해 내가 나에게 처방한 프로그램이며 선물이었다. 그 프로그램은 머리를 비우고 청소하는 작업이었다.

모든 것을 비운 상태에서 나는 한가로이 책을 읽었다. 어떠한 강박감도 없는 상태의 독서란….

역설적이지만 어른이 된 이후 그처럼 밀도 있고 유용하게 책을 읽은 기억은 없었던 것 같다.

몸과 마음이 아주 피곤할 때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본다.

풍광 좋은 곳에 '책 읽는 집' 혹은 '북테마 리조트' 같은 것이 있어 사람들이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우선 그곳에는 우리의 영혼을 채워줄 책이 가득해야 한다. 혼란·외로움·절망·두려움 등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정교하고 세심한 설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휴식을 위한 집, 용서와 화해의 집, 용기와 희망의 집, 사랑의 집, 추억의 집 등으로 분류된 이곳은 그야말로 '책은 힘이며 약이다'라는 믿음이 실현되는 공간이어야 한다.

서로 다른 삶의 현장에서 허겁지겁 살아온 가족들이 모처럼 함께 이곳을 찾아도 좋을 것이다.

온 가족의 버팀목 노릇을 하느라 맘 놓고 책 읽을 시간조차 내지 못했던 어머니는 추억의 집 '바벨 도서관'에서 책 냄새 풀풀 나는 미로(迷路) 같은 서가를 하루종일 누비며 스물 몇 해 전 꿈같던 한 시절을 기억하고 눈물지을지 모른다.

전나무 숲길을 지나 야외에 조성된 북테마공원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무대일 것이다.

미시시피강을 재현한 '톰소여 체험장'에서 개구리를 잡아먹는 허클베리핀의 흉내를 내보기도 하고, '장길산' '좀머씨' '옥이' 등 여기저기 서 있는 문학작품 속 밀랍인형을 보면서 "에이, 이 표정은 너무 현대적이잖아"라고 품평회도 한다.

휴식을 위해 집 누대(臺)에 마련된 서가는 아버지를 위한 책들로 가득 차 있다.

창가에는 도서관의 딱딱한 의자 대신 푹신한 소파가 놓여있을 테고. 반쯤 열어둔 미닫이 창 너머로 선들바람이 불어들어와 소파에 파묻혀 책을 읽다 잠들고 만 아버지의 지치고 안쓰러운 얼굴 위를 어루만지는 풍경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저릴까.

어쩌면 그곳에는 아름다운 노인 되기에 성공한 지혜롭고 마음 넉넉한 분이 주인으로 계실지도 모른다.

그런 분이 있어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얼마나 위안이 될까. 그가 새로운 계획을 정리하려고 찾아온 사람이라면 수십 년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 분의 지혜로운 한 마디 조언이 운명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외롭고 혼란스럽고 막막한 사람들이 이곳 어딘가에 숨겨져 있던 작은 단초를 만나 더 깊이 사색하며 더 빨리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기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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