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사장은 따로 있는데 …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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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호 17면

# 내 이름은 ‘언니’입니다. 명찰을 항상 가슴에 달고 다니는데도 ‘사장님’들은 나를 ‘언니’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늙수그레한 동생을 둔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언니야, 볼 좀 찾아줘.” “언니야, 7번 아이언 좀 주라.” “언니야, 거리가 얼마나 되지?” 뭐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는 약과입니다. 야릇한 눈초리로 제 몸을 훑어보며 황당한 멘트를 날리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정제원의 캘리포니아 골프 <117>

“언니~. 이 세상엔 딸기·초콜릿·바나나 우유 등이 있잖아. 그런데 내가 만든 우유는 뭐~게?”
“글쎄, 뭔데요.” “그건 바로 아이 러브 유~.”

캐디를 몸종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페어웨이 가운데에서 까딱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로 이렇게 말합니다.

“언냐, 7번 아이언 주라.” 클럽을 꺼내 들고 허겁지겁 달려가면 미동도 하지 않고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지금 보니깐 6번 줘야겠다.” 자기가 무슨 왕인 줄 아는가 보죠.
이 정도면 그래도 참을 만합니다. 말 한마디에 물이며 커피에 골프공, 티펙까지 일일이 갖다바쳐야 합니다. 담배를 피우다 자기 샷 차례가 되면 연기가 풀풀 나는 담배를 왜 제게 맡기는 건가요. 거리에 목숨을 거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린을 코앞에 두고도 거리를 물을 때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언냐, 핀까지 몇 야드니.” “언냐, 여기서부턴 거리가 얼마나 되지.” “언냐, 몇 야드 보면 되느냐고.”

한 홀에서 거리를 5~6차례나 묻는 이런 골퍼들을 보면 어떤 때는 이분이 유치원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 내 이름은 ‘사장님’입니다. 이름표를 항상 골프백에 달고 다니는데도 캐디는 나를 ‘사장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여성을 부하직원으로 둔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하기야 ‘사장님’이라고 부르면 싫어할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 호칭은 듣기에 좀 거북합니다. 실제로 우리 회사 사장님하고 운동을 나갔는데 캐디가 저를 ‘사장님’이라고 불러서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자기가 공주라고 착각하는 캐디도 많습니다. 질문을 하면 길게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한 냉랭한 표정으로 “예” “아니요”로만 대답합니다. 18홀 내내 웃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고, 묻는 말에 마지못해 대답을 하는 것 외에는 도통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 정도는 그래도 약과입니다. 어떤 캐디는 골퍼의 플레이 자체에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극히 사무적인 동작으로 클럽을 건네준 뒤 플레이가 1분이라도 빨리 끝나길 비는 듯한 표정입니다. 골퍼들을 마치 닭 몰듯이 밀어붙이는 캐디도 있습니다.

“사장님, 걷지 말고 카트 타시라니까요. 지금 늦었어요.”
주말 골퍼는 페어웨이를 걸어다닐 자유도 없는가 봅니다. 캐디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이렇게 말하면 클럽을 내동댕이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따라오는 뒤 팀도 없는데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냐”고 항변하면 캐디는 별 이상한 사람 다 봤다는 듯한 눈초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퍼블릭 골프장만 다니셨나 보죠. 이 회원제 코스에선 회원님들이 플레이를 빨리 끝내길 바라신다니깐요.”

아, 주말 골퍼는 심한 모멸감에 차라리 골프를 그만두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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