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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중앙 시조 대상] 대상 이한성씨, 신인상 강현덕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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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국내 최고 권위의 시조 문학상인 중앙시조대상 제23회 수상작으로 이한성(54)씨의 '가을 적벽'이 선정됐다. 또 제23회 중앙시조신인상은 강현덕(44)씨의 '느티나무 그늘'에 돌아갔다. 대상은 시집을 한 권 이상 펴냈고 등단 15년 이상인 시조시인, 신인상은 시조를 10편 이상 발표한 등단 5년 이상 10년 미만의 시조시인에게 수상 자격이 있다. 예심을 맡은 시인 이지엽씨와 정수자씨가 해당 시인들이 지난 1년간(2003년 12월~2004년 11월) 문예지 등 각종 지면에 발표한 신작 시조들 중에서 본심에 올릴 작품을 추렸고, 지난 10일 김제현.오세영.윤금초씨가 본심 심사를 했다. 제15회 중앙시조백일장 연말장원은 '문상'을 쓴 정선주(37)씨가 차지했다. 1월부터 11월까지 매월 실시한 중앙시조백일장 입상자들에게서 새 작품을 받아 그중 최고작품을 가리는 연말장원은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으로, 당선자는 등단 시인이 된다. 시상식은 23일 오후 5시30분 서울 중구 순화동 본사 로비 1층(L1) 세미나홀에서 열린다.

*** 대상

가을 적벽

이한성

살은 다 내어주고 뼈로 층층 단을 쌓고

하늘의 구름집 하나 머리에 이고 산다

거꾸로 나르는 새떼 회귀하는 빈 하늘

산처럼 우뚝 서서 오금박은 푸른 절벽

물에 비친 제 모습에 움찔 놀라 물러서는

외발 든 적송 한 그루 발바닥이 가렵다

암벽을 기어오른 어린 단풍 붉은 손이

물 속의 고기떼를 산으로 몰고 있다

흰 계곡 점박이 돌이 비늘 돋쳐 놀고 있는

멈춰 선 강물일수록 출렁이면 멍이 든다

햇살의 잔뼈들이 가시처럼 꽂힌 물밑

명경(明鏡)속 바라 본 하늘 물소리로 가득하다

*** 신인상

느티나무 그늘

강현덕

1.

둥글고 젓가락 많은 밥상 앞에 앉는다

바람에 잘 씻겨진 싱싱한 푸성귀들

아무리 먹고 먹어도 줄지 않는 이 성찬

나무와 더불어서 천 년을 사는 동안

나무보다 더 많은 나무를 키워냈다

손바닥 가득한 옹이 회백색의 시간들

2.

여섯 개 밥그릇은 채우면 비워졌다

잘 뻗는 나뭇가지 같은 우리들의 팔 다리

첫 새벽 잠 덜 깬 우물 어머니 바쁜 걸음

3.

안개도 구름도 내 등에 머물다가고

잘 여문 풀씨들도 오후 한 때 내게 기댄다

이 나무 짙푸른 그늘 내게도 묻었나보다

*** 대상.신인상 심사평

예심을 통과한 열 한 분의 대상 후보작들과 아홉 분의 신인상 후보작들 가운데서 이한성씨의 '가을 적벽'을 대상 수상작으로, 강현덕씨의 '느티나무 그늘'을 신인상 수상작으로 뽑았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던 후보들은 대상의 경우 김일연씨, 신인상의 경우 장수현씨 등이었다.

대상 수상작 '가을 적벽'은 풍경을 묘사한 일종의 서경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전통적인 서경시에 비해 두 가지 중요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돌발적인 상상력을 매우 신선하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형상화시켰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묘사 그 자체를 넘어 시인의 사유가 내적으로 철학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령 "명경 속 바라 본 하늘 물소리로 가득하다"와 같은 시행은 겉으로 보기에 단순한 풍경묘사 같지만 그 내면에는 시인의 깊이 있는 자연 철학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된다. 이는 사변이 중심이 된 전통 시조의 세계와 확연이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신인상 수상작 '느티나무 그늘'은 한 가정을 느티나무에 비유시킨 작품이다. 현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삶의 진정성이 무엇인가를 담담히 성찰하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특별하게 개성적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언어를 다스리는 감성, 원만한 조형력, 잘 짜여진 구성, 적절한 이미지 구사 등 별로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김일연씨의 작품들은 상상력이 보다 활달하고 시적 긴장감이 돋보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장수현씨의 작품들은 시상의 전개에 허점이 있고 표현도 다소 거칠었지만 신인다운 패기와 발랄한 개성이 높이 평가되었다.

본심 심사위원:김제현.오세영.윤금초

*** 대상 이한성씨

"아이들 바라보노라면 시심이 … "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눈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맑을 수 없어요. 마음이 맑기 때문일 텐데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훔쳐 사물을 바라보다 보니 결국 좋은 시가 써진 것 같아요."

전남 광주 송원중학교에서 1학년 주임을 맡고 있는 이한성씨는 최근 1, 2년 새 자신의 시에 나타난 변화 덕분에 중앙시조대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요즘 아이들은 럭비공 같고 귀엽다. 아이들을 지켜보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그런 생각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메모지를 가지고 다닌지 3년쯤 된다"고 말했다. 그는 "당선작 '가을 적벽' 중 '어린 단풍이 물 속의 고기떼를 몬다'는 구절도 아이들을 바라보다 얻은 구절"이라고 덧붙였다.

이씨의 기쁨은 그간 겪었던 골이 험난했던 만큼 더한 듯 했다. 그는 1972년 문인협회에서 발행하는 문예지 '월간문학'을 통해 화려하게 등단했지만 상과는 인연이 적었다. 설상가상으로 80~90년대 들어 후배들이 얄미울 정도로 좋은 작품들을 써내는 것을 보며 '내가 못하는 일을 한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한심하게 여겨져 위축됐다고 한다.

이씨는 "지금은 교장이나 교감 될 생각 없다. 마음을 비웠다. 정년까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아이들의 일상, 교육문제 같은 것들을 시로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 신인상 강현덕씨

"고향 떠난 후 안으로 파고들어"

"무지개를 보려면 비를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끝자락에 세우신 것은 좀 더 비 많이 맞고서라도 설익은 작품 쓰지 말고 좋은 글 많이 쓰라는 뜻이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1994년 중앙시조백일장 연말장원으로 등단한 강현덕씨는 올해가 중앙시조신인상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해였다.

그는 "2년 전 경남 창원에서 안산으로 이사온 후 한동안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했는데 고향이라는 그리움의 대상이 확실해지자 많이 외로웠고, 그래서 올해는 안으로 더 파고들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강씨는 처음에는 자유시를 쓰다가 90년대 초반 시조로 돌아섰다. 여러 사람들이 강씨의 시에는 내재율이 강하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조로 돌아선 후에도 시에 대한 관심은 놓지 않고 있다. 강씨는 시에 관심을 갖는 일을 "좋은 그릇(시조)에 담기 위해 맛있는 요리(시)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강씨의 바람은 자신의 시조를 좀 더 이미지화시키고, 친근한 일상용어를 많이 활용해 시조 확산에 한 몫하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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