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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의 패거리문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현실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선뜻 만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관계를 맺고 선을 긋는 일이 얼마나 피곤하고 마음쓰이는 일인가. 그런 만큼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과 부담없이 힘을 합치고 목적이 달성되면 즐겁게 헤어지는 것은 온라인 게임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영웅은 혼자가 아니다"는 홍보문구로도 유명한 일본의 온라인 롤 플레잉 게임 '팬터지 스타 온라인'(사진)은 특히 그런 이합집산의 재미를 만끽하게 해준다.

이곳에서라면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칼 한 자루로 세상을 바꿔놓기도 한다. 하지만 초보 영웅 지망생의 뜻대로 일이 풀려나가지는 않는다.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풋내기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온갖 고난을 이겨낸 후에야 돈과 명성을 얻어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다. 처음엔 할 일도 별로 없다. 섣불리 덤비다가는 좌절할 뿐이다.

영웅의 길은 잠시 접어두고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 동료들과 함께 나서지만 순조롭지가 않다. 필요한 건 조력자다. 영웅을 돋보이게 해줄 믿음직한 조연이다. 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이다. 조연보다 영웅이 되고 싶어하게 마련이다. 서로 어우러지지 못한 탓에 몇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다. 고독한 영웅에게는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대등하게 힘을 합칠 동료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영웅으로 가는 첫 발걸음을 떼어놓을 수 있다. '팬터지 스타 온라인'은, 자유로운 개인들이 모여 힘을 합칠 때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다는 고리타분한 잠언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어깨를 맞대고 적과 싸우면서 이러한 진리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깨닫게 된다.

반면 어떤 온라인 게임들에서는 전혀 다른 결론이 내려진다. 여기서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이유가 다르다.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는 곳을 특정한 길드로 묶인 몇몇 게이머들이 독점하고 있다.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 얼쩡거리다가는 몰매를 맞아 죽는다. 길드라는 뒷배경이 없으면 언제 습격당해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 혈맹이라는 이름 하에 복수해줄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개인은 없고 집단의 논리가 게임을 지배한다. 처음엔 뭔가 찜찜하고 거추장스럽지만 점차 패거리에 속하는 게 편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유로운 선택, 대등하게 나눠갖는 책임은 이보다 훨씬 두렵고 피곤하기 때문이다. 패거리 문화를 대표하는 게임이 국내에서는 유독 인기다. 현실을 지배하는 논리를 게임 속에서 다시 발견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게임평론가·sugy@madordead.com>

<필자 소개>1966년 서울 생. 연세대 경제학과·고려대 경제학과 대학원 졸업. 저서 『게임, 세계를 혁명하는 힘』(씨엔씨미디어). 현재 연세대 영상대학원·세종대 영상대학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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