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작별인사 가능할 때 인간답게 죽고 싶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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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병마가 내 근육을 서서히 갉아먹고 있어요. 숨통이 조여드는 고통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기는 싫습니다. 제발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라도 건넬 수 있을 때 떠날 수 있다면…."

운동신경질환(MND)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된 다이앤 프리티(43)라는 영국 여성이 안락사를 인정치 않는 자국법에 맞서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보장하라"고 인터넷 사이트(www.justice4diane.org.uk)를 통해 호소하고 나섰다.

영국 베드포드셔주의 루톤시에서 남편 브라이언, 두 자녀와 행복하게 살던 그녀에게 근육마비 증세가 찾아온 것은 1999년. 갑작스럽게 시작된 마비는 사지(四肢)로 빠르게 번져갔다. 두 팔이 굳어진 뒤에는 사랑하는 아이들을 안아줄 수조차 없게 됐다. 남편에겐 키보드와 컴퓨터 음성 합성기를 통해 말을 건네야 했고,튜브를 통해 음식을 공급받으며 목숨을 이어갔다.

다이앤은 앞으로 몇달 뒤면 호흡근육이 마비돼 숨을 못쉬거나 폐렴 등으로 죽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녀는 질식의 고통에 헐떡이는 모습으로 가족과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받아들이기 싫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 그녀는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브라이언도 번민 끝에 다이앤의 뜻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브라이언은 "아내에겐 가장 큰 소원이었지만 나에겐 가장 슬픈 결정이었다"며 처절했던 결심의 순간을 회상했다.

그러나 자살을 도울 경우 최고 14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영국법이 문제였다. 인권단체 등의 도움으로 2001년 7월 영국 검찰에 "남편이 자살을 도와도 처벌받지 않게 해달라"고 청원했지만 허사였다. 고등법원·대법원까지 찾아갔지만 청원은 수포로 돌아갔다. 변호인측은 "영국법이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삶을 방해하고 있으며,이는 유럽 인권협정을 위반한 것"이라는 논리를 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 3월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유럽 인권재판소를 찾았지만 지난달 29일 "영국법이 다이앤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판결,그녀의 '희망'은 또 꺾였다.

'죽을 권리'에 대한 다이앤의 투쟁은 영국과 전 유럽에서 안락사를 둘러싼 논쟁에 다시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고 있다. 다이앤을 도와 온 영국의 자발적안락사협회(VES)는 인권재판소 판결 직후 "영국의 자살 관련법이 유럽에서 가장 뒤처져 있다"며 "영국인들 90% 이상이 법개정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안락사에 반대하는 일부 시민단체는 "최근 유럽 각국에서 마련 중인 안락사 법에 제동을 거는 조치"라며 환영하고 있다.영국 생명존중연맹의 한 관계자는 "살 권리를 더 존중한 탁월한 판단"이라고 평가했다.

청원은 모두 실패했지만 다이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지난달 29일 남편의 도움으로 사이트를 열고 법 개정을 위한 네티즌 청원 운동에 나선 것이다. 다이앤은 웹사이트에서 "나같은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 선택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어야 한다"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이유없이 감내하도록 강요받아선 안된다"고 호소했다.

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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