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7>제101화우리서로섬기며살자 :26. TV들고 '금의환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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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칠 때까지 꾹 참고 기다렸다가 웅변대회 부상으로 탄 TV수상기를 들고 칼 파워스씨 집으로 '금의환향'했다. 파워스씨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그들은 트로피를 안고 온 동네를 돌았다. 파워스씨네는 동네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시골이라 그렇다 쳐도 그때만 해도 큰 동네에도 TV가 있는 집은 드물었다. 가난한 광산 노동자들로서는 내가 파워스씨에게 TV를 선물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매일 저녁 아랫동네 사람들이 외딴 집으로 TV를 보러왔다. 우리나라로 치면 장욱제·태현실 주연의 '여로'가 전국적인 열풍을 몰고 왔을 때의 풍경을 연상하면 되겠다.

파워스씨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광산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집 근처 땅을 가꾸며 소 두 마리를 키우던 가난한 농가였다. 카멘 형은 결혼했고, 동생 클로드는 공군이었다. 클로드는 나중에 한국의 오산에서도 근무했다.

나는 서머스쿨에 다녀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집안 일을 도왔다. 한국에서 했던 그대로 소를 몰고 나가 풀을 먹이고 커다란 낫으로 산비탈의 풀을 베어다가 널어 말렸다. 장작 패는 일은 물론이고 빨래까지 도와드렸다.

칼 파워스씨 집에는 우물이 없었다. 그래서 아랫 동네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는데, 여름방학 동안 나와 파워스씨가 우물을 파서 집안으로 수도를 끌어들였다. 그러자 가족들은 집이 호텔로 변했다면서 너무나 기뻐했다.

바로 옆에 있는 파워스씨 외삼촌댁에는 4남매가 있었는데 큰딸이 나보다 두 살 적어 그녀와 나는 친구처럼 어울렸다. 외딴 곳에 집이 두 채 밖에 없었으니 우편배달부가 자주 올 리 만무했다. 우편함도 집에서 2㎞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내가 편지를 넣고 우편함에 딸린 깃발을 올려놓으면 이 지역을 도는 배달부가 편지를 가져가면서 깃발을 내려놓고, 편지가 오면 이번엔 배달부가 깃발을 올려놓았다. 가끔 편지를 부치러 내려 가다가 깃발이 올려진 것을 보면 가슴이 둥둥 마구 뛰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한국의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꼭꼭 편지를 썼다. 학교 생활을 알리고 나선 꼭 교회에 나가기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칼 파워스씨는 경제적인 사정이 여의치 않자 지역 신문인 디킨스니언에 모금을 요청하는 글을 여러 차례 기고했다. 나를 처음 만난 사연부터 나의 학교 생활까지 소개하는 글이 보도되자, 가난한 광부들이 5달러에서 10달러까지 신문사로 성금을 보내주었다. 그렇게 모인 돈이 자그마치 1천달러나 됐다.

나는 방학 때마다 파워스씨와 함께 디킨스니언 신문사에 들러 사장과 편집국장에게 인사를 드렸다. 디킨스니언 사장이 내게 하는 말은 늘 똑 같았다.

"빌리, 칼 파워스씨가 너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풀고 자신을 희생하는지 잊지 말아야 한단다. 가난한 광부들이 너를 위해 한푼 두푼 보내준 것을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네가 나중에 한국에 가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열심히 일하기 바라기 때문이야."

그때만 해도 미국 남부지역에 동양인, 특히 한국인이 거의 없었으므로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나를 관심있게 쳐다봤다. 당시 미국 사람들은 한국전쟁 때문에 한국을 알게 된 터라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면 모두들 측은하게 여겼다.

파워스씨가 나에게 선물을 사주려고 백화점에 갔을 때 가게마다 불쌍하다며 돈을 받지 않았던 기억도 남아 있다. 그들이 나를 동정할 때면 나는 창피하다는 생각보다는 파워스씨가 돈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속으로 흐뭇해하곤 했다. 미국이 워낙 잘 사는 나라여서인지 그들이 나를 도와주는 것이 그렇게 감사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미국 유학 8년 동안 나는 한번도 한국에 나오지 못했다. 비싼 비행기 삯 때문이다. 또 수원 집에 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 목소리를 한번도 듣지 못했다. 편지를 주고받는 게 고작이었다. 내가 미국에서 잘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칼 파워스씨 가족의 사랑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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