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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학창시절 : 가난이 싫어서 '있는 집' 아이에 심술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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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또 6학년 일기장엔 "초가집이 변해 기와집도 될 수 있고, 흙담장이 변해 벽돌담이 될 수 있다. 이뤄내고야 말겠다" "내가 크면 전 인류의 등불이 될 것이다. 아니 그것이 안 될지라도 단 10명의 등불이 될 것이다. 그게 안 되면 한 명이라도…"란 구절이 있었다고 영옥씨는 기억하고 있다.

노무현은 6학년엔 '변론부'에서 특별활동을 했다. 잦은 결석에도 불구하고 변론부 활동은 68일 가운데 67일 참석했고 평점도 상(上)을 받았다. 노무현의 고향 친구인 이재우(在友·55)진영농협조합장은 "당시 전교 회장 선거에서 무현이가 '보리밥 먹고 자라 키는 작지만 작은 고추가 맵다'면서 애들을 웃겨가며 연설했다"고 기억했다. 이 때의 노무현 별명은 '돌콩'. 작지만 야무지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노무현은 자전 에세이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나만 가난했던 것도 아닌데 어린 시절의 나는 유독 가난을 심각히 여기며 자랐다. 그리고 그 상처는 나의 잠재 의식 속에 어떻게 해서라도 나만은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열망과 함께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동시에 심어졌던 것 같다."

노무현은 59년 중학교에 입학할 때도 우여곡절을 겪는다. 입학금이 없어서였다. 그러다 '입학 때는 책값만 내고 입학금은 봄 농사를 지어 7월까지 갚는다'는 조건으로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와 진영중학교를 찾아간다. 교감선생님을 만나 여름에 복숭아 농사를 지어 입학금을 내겠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교감은 안된다고 잘랐다.

교감은 노무현의 어머니에게 "당신 큰아들은 대학 나와도 저렇게 백수건달 아니냐. 공부시킬 필요없다"고도 했다. 설움에 북받친 어머니가 교감 앞에서 펑펑 울자 노무현은 입학원서를 북북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어머니 집에 갑시다. 나 이 학교 안다녀도 좋소"라며 뛰쳐나왔다. 그런 노무현에게 교감은 "저 봐라. 저런 놈 공부시켜 봐야 깡패밖에 안된다"고 말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큰형은 다음날 학교를 찾아가 교감의 멱살을 잡고 "공부해봐야 깡패밖에 안된다"는 비교육적 발언을 문제삼겠다고 항의했다. 결국 교감은 자신의 발언을 사과했고 노무현은 중학생이 됐다. 푸른정치연합의 장기표(張琪杓)대표가 노무현의 중학 1년 선배다.

학교생활은 불안정했다. 노무현은 "1학년 담임선생님이 급장을 임명할 때도 아이들은 모두 내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다른 아이를 지명했다. 그 아이는 읍내에서 비교적 잘 사는 아이였다. 나는 시골 아이들과 작당해 걸핏하면 급장에게 시비를 걸었다"고 회고했다.

노무현이 2학년 진급을 얼마 남기지 않은 60년 2월이었다. 학교에선 3월 26일 이승만(承晩)대통령 생일을 기념하는 글짓기 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노무현의 눈에는 글짓기 대회가 3·15 대통령 선거를 앞둔 불법선거운동으로 비춰졌다. 그 무렵 아버지 판석씨가 "김구(金九)·여운형(運亨)선생은 대통령이 죽였다"고 말하면 노무현은 "그런 나쁜 사람이 어딨느냐"며 분개하곤 했다는 게 형 건평씨의 기억이다.

이같은 '이승만 관(觀)'을 가졌던 노무현은 친구들에게 아무 것도 쓰지 말자며 백지동맹을 선동했다. 주동자로 적발된 노무현은 교무실로 끌려가 벌을 서던 중 4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던 조병옥(趙炳玉)박사의 서거 소식을 듣는다. 노무현은 당시 "어린 마음에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절망을 느꼈다"고 한다. 노무현은 반성문을 쓰라는 주임선생님의 지시에도 자초지종만 적고 잘못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쓰지 않았다. 주임선생님이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분인지 아느냐"고 묻자 노무현은 "옛날에는 독립운동을 한 훌륭한 분이었으나 지금은 독재를 하고 있습니다"며 굽히지 않았다.

건평씨는 "그 때 무현이가 1주일간 정학당해 집안에서 크게 걱정을 했었다"며 "중학생이지만 정치 문제에도 관심이 깊었던 편이었다"고 말했다.

노무현은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공납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1년간 휴학을 한다. 이런 끝에 당시 부산의 대표적 상공인이던 김지태(金智泰)부산일보 사장이 운영하던 부일(釜日)장학회 시험에 합격한다.

그래서 중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고, 부산상고 진학 후에는 金사장이 만든 백양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았다. 노무현은 "나의 오늘은 그 분이 디딤돌을 놓아주신 셈"이라며 고마워하고 있다. 훗날 변호사가 된 노무현은 86년 金사장의 사후에 유가족들이 상속세 1백17억원이 부당하게 부과됐다며 국세청을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을 맡아 승소판결을 이끌어냈다. 보은(報恩)한 셈이다.

노무현의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살펴보면 전 교과에서 3년간 대부분 '수'와 '우'를 받았고 몸이 약했던 탓인지 체육엔 가끔씩 '미'가 보인다. 가정환경란엔 '과수원 6백평, 양계장·부동산 1백만환, 동산 10만환'으로 기록돼 있다. 노무현의 친구들은 "양계장도 큰형 고시공부 뒷바라지에 들어갔다"고 했다.

노무현의 종합기록란에 적혀 있는 당시 담임선생들의 기록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성적이 우수하고 지도능력이 있으나 결석이 많고 경솔한 편이다.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며 진취성이 엿보인다."(1학년)

"신체가 약한 관계로 병 결석이 많으며 성격은 명랑한 편이다. 성적은 2학년 전체에서 1,2위를 차지할 만한 좋은 머리를 갖고 있다."(2학년)

"신체 허약하나 두뇌 명찰함. 행동은 불안한 거동이 많으며 악화의 우려조차 엿보임. 지나치게 자만심이 강하여 타(他)와 비협조적임."(3학년)

행동발달사항에서도 담임들의 평가는 학년별로 엇갈린다. 가령 2학년엔 "자주성과 정의감이 강하여 의지가 굳으며 연령에 비하여 속성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믿음직하고 학급의 지도적 입장에 있다"고 한 반면, 3학년은 "두뇌 명철 사리의 판단력이 풍부함. 그러나 비타협적이며 극히 독선적임"이라고 돼 있다. 특히 1학년 때 담임선생은 노무현의 적성을 '정치가'라고 파악하고 있는 반면 본인과 학부형의 희망은 '군인'이라고 돼 있어 흥미롭다. 1학년 때 '인문고교'를 지망한 노무현은 2학년엔 '상고'로 바꾸고 장래의 희망도 '실업가'로 적는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집안의 어려움은 더 심해진다. 가세는 계속 기울어 둘째형 건평씨도 학업을 그만둬야 했고 조그만 복숭아 과수원마저 빚에 쪼들려 처분한다. 1년 휴학 끝에 62년 6월 1일 복교했지만 이후 출석상황에 대한 담임의 평가는 '불량함'이다. 이는 노무현이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현재 9급 시험)을 거쳐 독학으로 고등고시를 보겠다는 결심을 한 데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학교 3년생인 노무현이 고시공부를 하겠다면서 큰형이 보던 고시서적을 꺼내 읽는 것을 안 큰형 영현씨는 크게 화를 냈다. 영현씨는 동생 노무현에게 부산상고 진학을 권했다. 공립학교인데다 백양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장학생으로 부산상고에 입학한 노무현의 꿈은 졸업 후 은행원이 되는 것이었다. 부산으로 유학을 간 노무현은 방을 얻어 자취를 하거나 하숙할 형편이 못됐다. 그는 부산 범일동에 있던 소화기 판매회사 사무실에서 야간경비를 봐주고 라면으로 숙식을 해결했다. 때론 부산에 시집가 살던 누나집이나 친구집을 전전했다. 이도 저도 안되면 학교로 가 교실 마루바닥에서 잤다. 겨울철 차가운 교실마루에서 이틀을 밤새 몸을 떨며 이를 악물었더니 이가 아파 아침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노무현의 고교 시절 회고다.

"1학년을 그럭저럭 보낸 후 2학년이 되면서 난 '농땡이'를 치기 시작했다.머리를 안 깎이려 시험시간에 도망치기도 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과 담배를 배웠다. 성적은 중간도 안되는 수준까지 떨어져갔다. 한마디로 고등학교 시절은 방황의 연속이었다."(『여보 나좀 도와줘』)

노무현의 성적은 1학년 5백2명 중 48등. 2학년엔 4백81명 중 2백13등으로 곤두박질쳤다. 3학년이 되면서 노무현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해 취직공부에 열을 올린다. 대학 갈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진학반 대신 취업반을 선택했다. 생활기록부엔 노무현이 졸업할 때 주산 3급·부기 2급·타자 3급 자격증을 취득한 것으로 돼 있다. 3학년 졸업 성적은 4백62명 중 59등이었다. 생활기록란엔 노무현에 대해 "친근한 성품의 소유자"(2학년), "성실하고 명랑하다"(3학년)고 적혀 있다.

3학년 때 노무현이 독서실을 다닐 때다. 노무현은 당시 독서실에서 총무를 맡고 있던 부산상고 1년 후배 최도술(崔道述)과 시비가 붙었다. 최도술이 노무현의 뺨을 때리자 노무현은 순간적으로 책상 위에 올라가 공부하던 학생들을 상대로 그동안 최도술이 총무로서 보여준 횡포들을 하나하나 고발하는 일장연설을 시작했다고 한다.

80년대 초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최도술은 변호사를 하고 있던 노무현을 우연히 만나 그의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을 맡는다. 최도술은 지금은 노무현의 부산 북·강서을 지구당 사무국장으로 일한다.

노무현은 부산상고를 졸업할 무렵 농협 입사시험을 봤으나 떨어졌다. 노무현은 당시 합격을 자신했던 모양인지 고향 친구들에게 자신의 졸업앨범비로 '농협 김해지점 합격턱'을 미리 냈다고 한다. 그러다 막상 자기보다 성적이 나쁜 학생이 합격하고 자신은 낙방하자 굉장히 자존심 상해 했다는 것. "급하게 시험준비를 했지만 주산은 벼락치기가 안 통했다"는 게 본인의 분석이다. 둘째형 건평씨는 "어머니가 늘 막내 아들이 상고 졸업하면 번듯한 은행에 들어갈 거라고 동네에 자랑하고 다녔는데 크게 낙심하셨다"고 말했다.

결국 노무현은 삼해공업이란 어망회사에 취직을 한다. 하지만 노무현은 이 첫 직장을 한달 반 만에 그만둔다. 월급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한달 하숙비도 안되는 돈이었다고 한다. 함께 입사했던 친구 네 명이 함께 사장을 찾아가 그만두겠다고 했다. 사장은 월급을 올려주겠다고 했지만 노무현은 차라리 고시공부나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노무현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달 반치 월급 6천원을 받고 뭘 할까 고민을 했다. 옷을 살까 구두를 살까 망설이다 결국 기타 한 대 사고, 고시공부용 헌 책 몇 권, 나머진 술 마시고 영화보는 데 모두 써 버렸다. 그리곤 내 고향 진영으로 내려갔다."(『상식 혹은 희망 노무현』,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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