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때 다른 금감원의 CEO 조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7면

#1. 지난해 12월 17일 금융감독원은 국민은행에 대한 사전검사를 하면서 강정원 행장이 은행 차량을 개인 용도로 썼다는 제보를 확인하기 위해 운전기사 2명을 불러 조사했다. 근무시간이 지난 오후 7시30분~10시15분까지 2시간45분 동안 강도 높게 이뤄졌다. 사전검사가 끝난 뒤 KB금융 회장으로 선출됐던 강 행장은 내정자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당시 금감원의 조사를 놓고 관치금융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이에 대해 금감원 측은 “금융회사 임원에 대한 각종 비리 제보가 들어오면 이를 확인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정당한 조사였다는 것이다.

#2. 지난 4월 1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이귀남 법무장관이 출석했다.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은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지난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사건과 관련해 검찰 내사를 받은 데 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 주 의원이 “(라 회장이) 금융실명제를 위반했다는 사실을 검찰에서 확인한 것이 틀림없느냐”고 질문했다. 이 장관은 “예. 그렇게 알고 있다”고 답변했다. 법 집행을 책임지고 검찰을 지휘 감독하는 법무장관이 금융실명제를 위반했다고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22일 국회 정무위원회에 출석한 김종창 금감원장은 “점포와 대상, 거래 기간과 계좌 등 구체적인 것이 있어야 조사를 할 수 있는데 검찰에서 통보를 받은 것이 없다”고 답했다.


강 행장의 비리 제보를 확인하기 위해 주변에 대한 야간 조사를 마다하지 않던 금감원이다. 하지만 법무장관이 확인한 금융실명제 위반 사안은 자료가 없어 조사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를 두고 금융계와 정치권에선 명백한 ‘이중 잣대’라는 비판이 나온다. 익명을 원한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금융회사 CEO에 따라 금감원의 대처가 달라진다면 감독 정책에 대한 신뢰도가 크게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조영택 의원도 “금감원이 검찰에 자료를 요청할 수 있는 규정이 법에 명시돼 있다”며 “문제가 있으면 금융회사의 모든 것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금감원이 자료가 없어서 조사를 못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현행 금융 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은 비실명 거래를 한 금융회사 임직원과 금융회사엔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본지 확인 결과 비실명 거래를 한 금융회사 임직원은 과태료와는 별도로 금감원의 제재를 받아야 한다.


금감원이 홈페이지에 게시한 ‘금융기관 검사 및 제재에 관한 규정 시행세칙’엔 금융실명제 위반에 따른 제재 기준이 자세히 나와 있다. 과태료 처분만으론 금융질서를 문란케 하는 행위를 제대로 감독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금융회사 직원이 고의로 3억원을 초과하는 비실명 거래를 하는 경우 ‘정직 이상’의 제재를 하도록 돼 있다. 금감원의 금융회사 직원 제재 수위는 주의·견책·감봉·정직·면직 등 다섯 단계다.

다만 라 회장 같은 임원, 그것도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금융실명제를 위반한 경우에 대한 제재 수위는 시행세칙에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비실명 거래의 경우 창구 직원을 제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임원에 대한 제재 수위는 보통 주의·주의경고·문책경고·업무정지·해임권고의 다섯 단계다.

라 회장이 실명제를 위반했다고 의심 받는 금액은 50억원이다. 이 정도의 돈을 직원이 고의로 실명제를 어겨가며 다뤘다면 정직을 받아야 하는 사안이다. 정직에 해당하는 임원의 제재 수위는 업무정지다. 우리은행장 재직 시절 파생상품 투자 손실을 입은 황영기 전 KB금융 회장이 업무정지 상당의 중징계를 받고 물러났다.

또 라 회장은 회사 임직원 명의의 가·차명 계좌를 이용해 왔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익명을 원한 금융계 관계자는 “만일 이 부분이 사실이라면 가·차명 계좌를 제공한 다른 임직원들도 조사 받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시행세칙에선 비실명 거래를 한 금융회사 직원 당사자와 이를 따른 사람, 감독자도 제재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지주회사 감독과 검사를 담당하는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라 회장의 조사 여부에 대해서는 뭐라 언급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원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