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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만학도, 619명 뚫고 한국 미술 새 주인공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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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제32회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박제성씨가 수상작 ‘더 스트럭처(The Structure)’ 앞에서 작품 제작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뒤늦게 유학길에 오른 30대 만학도가 한국미술의 새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23일 오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제32회 중앙미술대전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은 박제성(32·영국왕립예술학교 영상전공)씨다.

박씨는 이날, 20일부터 함께 전시 중이던 올 중앙미술대전 선정작가 19명을 제치고 대상(상금 1000만원)의 영예를 안았다. 상금 각 500만원의 우수상은 평면 부문의 안경수(홍익대 대학원 동양화과 졸), 입체 부문의 정재훈(경북대 미술학과 조소전공 졸)씨가 공동 수상했다.

중앙일보가 주최하고 포스코가 후원하는 올 중앙미술대전에는 지난 1월 619명이 포트폴리오를 접수했다. 심사위원 다섯 명이 포트폴리오를 거르는 1차 심사를 통해 2월에 ‘선정작가’ 20명을 선발했다.

이들이 새로 제작한 작품을 심사위원들이 전시장에서 직접 보며 진행한 2차 토론 심사 끝에 박제성씨가 23일 대상 작가로 뽑혔다. 전시는 7월 4일까지 열린다. 1978년 시작된 중앙미술대전(fineart.joins.com)은 국내 젊은 미술작가들의 대표적 등용문이다. 02-2000-6330.



누구나 즐기는 놀이기구 속 쾌락과 공허함 표현

박제성씨가 말하는 대상작‘더 스트럭처’

23일 오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제32회 중앙미술대전 시상식이 열렸다. 왼쪽부터 유진상 심사위원, 박보균 중앙일보 편집인, 안규철 운영위원장, 우수상 수상자 안경수, 대상 수상자 박제성, 우수상 수상자 정재훈, 김상영 포스코 부사장, 박만우 심사위원. [최승식 기자]

두터운 검은 안경테 때문일까, 동료들보다 많은 나이 탓일까. 대상의 기쁨을 지그시 누른 대상 수상작가 박제성씨는 듬직하고 침착해 보였다. 서울대 미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뒤 광고회사에서 우수 사원으로 착실하게 이력을 쌓던 그는 2007년 돌연 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새로운 미디어에 대해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누를 길 없던 그는 영국 런던으로 날아가 영국왕립예술학교 영상전공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나이 들어 다시 시작하는 공부를 부모님이 전폭 지지해주셔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출품작 ‘더 스트럭처’는 현대인이 즐기는 놀이기구의 공허함을 시각적으로 다룬 것입니다. 누구나 한번쯤 타봤을 테마 파크나 대형 유원지의 놀이기구는 아름답고 극단적 쾌락을 오가지만 몹시 불안하고 불편하죠. 탈 때는 정신 없이 소리치고 소스라쳐도 땅에 내리는 순간 찾아오는 허망함은 어쩔 수 없죠. 파편화된 현대의 삶을 깊은 바닷속 발광하는 생물체처럼 빛나는 놀이기구로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박씨는 수상의 영광을 음미할 새도 없이 24일 런던행 비행기를 탄다. 히드로 공항에 내리자마자 졸업작품전이 열리는 전시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빡빡한 일정 속에 살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인 부인 이영리(30)씨 또한 올 여름 런던 ‘컬리지 오브 패션’을 수석으로 졸업할 예정이다. 2010년은 이 젊은 예술가 부부에게 각별한 한 해가 될 모양이다.

글=정재숙 선임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일관된 주제의식, 정교한 솜씨 … 비디오 미술에 큰 역할 기대

박만우 심사위원장 총평

올 중앙미술대전 선정 작가 20명은 이제 막 대학이나 대학원을 졸업한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 작업에서 도전의식이나 실험성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자신이 채택한 매체나 장르를 과도하게 의식한 나머지 기존의 정형화된 틀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여 적지 않은 아쉬움을 느끼게 했다. 다만 한국적 팝아트의 변용이라 할 수 있는 오브제 작업이나 극사실적인 회화 작업이 보이지 않아 기존 미술시장의 트렌드와는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한 건 다행이었다.

우선 작품세계가 완성되지 않은 신예들이므로 작품 못지않게 그 안에 담겨 있는 미적 태도와 접근 방식에 심사의 비중을 두었다. 동시대 사회와 역사에 대한 태도, 각자의 예술전략, 그리고 매체에 대한 충분한 이해도 등이 기준이 됐다. 그룹전이라는 공개 경쟁인 만큼 개별 작품이 전시라는 틀 속에서 물리적으로 구현된 성취도 역시 중요한 조건이었다. 특히 입체나 뉴미디어·영상 작품의 경우 차별화된 방식으로 설치돼야 하므로 작가들이 좀 더 디스플레이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 주기를 주문하고 싶다.

수상 작가 선정에선 어렵지 않게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었다. 영상설치 작업을 보여준 박제성은 심사위원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토론과 숙의를 거쳐 영예의 대상작가로 결정했다. 작가의 포트폴리오를 통해 일관된 주제의식을 읽어 낼 수 있었고, 이번 출품작도 완성도 면에서도 단연 수작이었다. 다양한 유형의 놀이공원에서 볼 수 있는 유희와 물질적 소비의 장면을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통해 매우 정교하게 재구축했다. 앞으로 주목해야 할 젊은 영상설치 작가를 만나게 된듯하다. 여전히 불모지대인 한국 비디오 미술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우수상 안경수 역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반영한 드로잉 작업이 평면부분에서 가장 신선하게 보였다. 또 다른 우수상 정재훈의 경우, 전시장의 제약에 기인한 나머지 조금 미흡한 부분도 있었지만 산업기술의 합리성과 원시적 수공솜씨, 2차원적 평면성과 3차원적 입체라는 이분법을 넘나드는 문제의식의 진지함이 돋보였다. <미술평론가·조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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