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청정한 바닷가, 깊은 깨달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극락이나 천국이 하늘 높은 어디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으면 깨달음을 얻은 그 자리가 극락이다."(1백39쪽)

소설가 한승원씨가 깨달음을 얻은 곳은 청정한 바닷물 스며드는 남도의 바닷가 개펄이다. 그러니까 이 산문집은 1997년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전남 장흥에 집필실 해산토굴을 차려 생활하며 얻은 사유의 결실이다. 서점과 도서관을 애용하던 심약한 도시인이 바닷바람을 쐬며 다시 태어난 '재생(再生)의 기록'이라고 할까.

"말하자면 나는, 바닷가 학교의 커리큘럼에 따라, 바다의 시간과 순리를 공부하는 학생이다. 바다라는 요양원에서 갯벌밭이라는 영험한 의사의 처방에 따라 요양하는 원생이다."(서문)

산문집은 크게 바닷가를 보며 떠올린 수상, 바다의 생리를 삶의 원리로 조직하려는 생각, 왜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잠언들, 글쓰기에 대한 성찰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글쓰기에 관한 산문들을 보면 이 산문집에 담겨있는 생각의 밀도가 어쩌면 그렇게 촘촘한지, 문장 하나하나가 공장에서 생산된 기성복 같지 않고 손바느질로 힘들여 짜낸 수제품 같은지 알 수 있다. 작가는 영혼이 진실하지 않은 자의 글쓰기에선 "만장처럼 너풀 거리는 허위의 구린내"가 풍김을 일갈한다.

말미에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붙어있다. 그의 딸 한강씨는 재능있는 젊은 소설가다.

"내 딸, 강아, 작가의 길은 힘이 들지라도 외롭지는 않다. 왜냐하면 자기가 좋아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는 주인공들이 모여 사는 공화국, 자유의 시공 속에서 그들과 더불어 자유를 향유하면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산문집에는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도 담겨 글 맛을 더해준다.

우상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