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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171> 지리적 표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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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청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추일 것입니다. 꼬막은 그래도 벌교라는 지명과 가장 잘 어울리고요. 그 지역에서 생산된 특산품은 맛이 남다르다는 오랜 경험의 산물입니다. 요즘엔 경제적으로도 중요해졌습니다. 조금 비싸더라도 본고장 산물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 ‘이름값’도 비싸진 겁니다. 다른 곳에서 함부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법적 권리도 부여합니다. 바로 ‘지리적 표시제(GIS· Geographical Indication System)’입니다. 한-EU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더욱 중요해진 지리적 표시제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최현철 기자

스위스의 한 마을, 1000년 넘게 쓴 이름 못 써

2008년 4월. 스위스 뉴샤텔의 한 마을 어귀에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주민들은 마을 표지판을 지게차로 뽑아내더니 그 자리에 프랑스 국기와 샴페인 한 병을 꽂았다. 이 마을 이름은 ‘샹파뉴’. 885년 이후 1000년 넘게 마을 이름을 딴 포도주와 쿠키, 빵을 만들어 팔아왔지만 2000년 이후 세계적 짝퉁 공장으로 낙인찍혔다. 프랑스 샹파뉴아르덴주에서 생산된 발포성 백포도주에만 ‘샴페인’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프랑스 측 주장을 스위스 정부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마을에선 샹프·샹파누·캉파뉴 등 다른 이름을 붙여봤지만 짝퉁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마을에서 만들어진 샴페인 판매량은 2004년 11만 병에서 2007년엔 3만2000병으로 곤두박질했다. 지리적 표시제의 위력이 드러난 상징적인 사건이다.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샴페인’이란 주류 이름이 최근 주세법에서 사라졌다. 대신 공식 명칭이 ‘발포성 와인’으로 바뀌었다. 지난해 한-EU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따라 ‘지리적 표시제’를 수용한 결과다. 이제 다른 나라에서 만든 샴페인으로 누군가를 축하해줄 땐 “발포성 와인을 터뜨렸다”는 표현을 써야 정확한 표현이 되는 셈이다.

지리적 표시제, 1994년 WTO 출범하면서 공식화

지리적 표시제란 상품의 품질과 특성이 해당 상품의 ‘원산지’ 때문에 생겼다면 그 원산지의 이름을 상표권으로 인정해 준다는 것이다. 이 개념이 국제조약에 처음 등장한 것은 최초의 지적재산권 협정인 1883년의 파리 협약이다. 원산지의 명칭이 산업재산권 범위에 포함돼 있는 지리적 표시에 대해 협약 동맹국들이 내국인과 동등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엉뚱한 사람이 거짓으로 원산지를 표시해 팔면 압류한다는 조항까지 뒀다.

하지만 명실상부한 국제규범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94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면서다. 부속 협정으로 채택된 지적재산권 협정(TRIPs)에 원산지를 오인하게 만들 수 있는 상표는 각국이 등록을 거부하거나 무효로 해야 한다고 명시한 것이다. 기존의 지리적 표시 관련 협약은 체결 당사국에만 적용되는 양자 규정이었지만 TRIPs는 WTO의 모든 회원국이 지켜야 하는 국제규범이 됐다.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돼 4년간의 유예를 받은 한국은 1999년 1월 개정된 농산물품질관리법에 지리적 표시제를 도입했고, 2000년부터 전면 실시했다. 이에 따라 지리적 표시로 등록된 상표에 대해 배타적 권리가 부여됐다. 권리를 침해받은 경우 침해금지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와 소송을 통해 손해를 배상받을 권리도 명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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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A가 체결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 강화됐다. 지금까지 체결된 칠레·미국·유럽연합(EU)과의 FTA 협정에는 지리적 표시 보호가 별도로 규정됐다. 특히 EU와의 FTA에서는 우리나라가 64개, EU가 162개의 지리적 표시 상표를 서로 보호해 주기로 구체적인 약정까지 맺었다. 여기엔 메독·보르도·보졸레·부르고뉴·마고 등 프랑스 와인과 아이리시 위스키·코냑 등 술이 80종류나 포함됐다. 카망베르 치즈도 보호대상으로 규정돼 함부로 쓸 수 없는 말이 됐다. 한국에서 이런 이름으로 비슷한 제품을 만들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같은 명칭을 가진 다른 나라의 상품도 수입할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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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보성 녹차 … 국내에서 102개 등록

국내 지리적 표시제에 등록한 첫 상품은 법 시행 2년 뒤에야 나왔다. 1호 상품의 주인공은 보성 녹차. 이후 하동 녹차와 고창 복분자가 뒤를 이었고 올 4월 말까지 농축산물 66가지, 임산물 29가지, 수산물 7가지 등 모두 102개 품목이 등록됐다.

지리적 표시 보호를 받으려면 농산물품질관리원이나 산림청에 등록을 해야 한다. 물론 신청한다고 다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품목의 우수성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어야 하고(유명성) ▶그 특성이 지리적 원산지 때문에 생긴 것이며(지리적 특성) ▶해당 상품의 생산과 가공이 그 지역에서 이뤄져야 한다(지역 연계성)는 조건을 갖춰야 한다. 신청이 접수되면 두 차례에 걸친 서면심사와 한 차례의 현지조사를 통해 조건을 충족하는지 심사를 벌여 등록이 최종 확정된다. 등록된 상품에 대해선 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분기당 한 번 이상 생산과 유통 단계를 조사해 조건이 제대로 유지되는지 사후관리도 한다.

한편 특허청은 이와 별도로 2004년부터 상표법에 ‘지리적 표시 단체표장제’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보호하는 내용엔 큰 차이가 없지만 지리적 표시제가 농수산물을 위주로 운영되는 반면 단체표장제는 공산품도 포괄한다는 차이가 있다. 이천 도자기와 춘천 막국수 등 모두 32개 상표가 지리적 단체표장 등록을 해둔 상태다. 이 중 보성 녹차를 비롯한 20개 품목은 지리적 표시제와 중복 등록이 돼 있다.

지리적 표시제 등록에 따른 경제적 효과는 비교적 뚜렷하다. 소비자들이 지리적 표시를 ‘품질보장 장치’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전국적으로 유명한 상품은 유사 제품이 시장을 갉아먹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조금 인지도가 떨어지는 상품은 홍보효과도 누릴 수 있다. 국내 1호 지리적 표시제 상품인 보성 녹차의 경우 등록 1년 만에 재배면적이 72㏊, 재배농가는 60가구가 늘어나는 효과를 봤다. 최상급인 우전의 경우 2001년 100g당 4만원이던 가격이 2003년엔 최고 10만원까지 뛰었다. 보성이 녹차 주산지라는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보성 녹돈’ ‘녹차해수탕’ 등 부가상품도 덩달아 인기를 누리고 있다. 농림수산식품부가 지난해 보고받은 연구용역 자료에 따르면 2006~08년 서울 가락동 도매시장에서 지리적 표시제 등록을 한 사과의 평균 가격(15㎏)은 2만9039원으로 미등록 제품보다 5462원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버드와이저·고려인삼 … 끊이지 않는 분쟁

지리적 표시제 인정이 국제규범으로 자리 잡았고 각국이 보호제도를 두고 있지만 지리적 표시 상표를 둘러싼 분쟁은 아직도 끊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스위스 샹파뉴 마을 분쟁은 동일한 지명 때문에 발생한 사례다. 우연히 이름이 같은 마을에서 비슷한 품목을 생산하다 보니 등록을 하지 못했거나 나중에 등록한 지리적 표시 상표는 보호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일부 품목의 이름이 원산지보다 더 유명해지거나 일반명사로 보편화됐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버드와이저(Budweiser) 맥주 분쟁이다. 이 맥주는 1265년 유럽에서 처음 나왔다. 체코의 보헤미안 왕이 부데요비츠 마을에 맥주를 만들 수 있는 특권을 주면서 부드바르(버드와이저)란 이름의 맥주가 탄생했다. 1895년부터는 유럽 전역에서 지리적 표시 보호를 받아왔다. 그런데 독일계 미국인 안호이저-부시가 체코에서 맛본 부드바르 맥주 맛에 반해 제조기술을 미국에 도입했다. 1907년엔 미국에서 버드와이저란 이름으로 상표권 등록까지 마쳤다. 당연히 유럽에서 거세게 항의했고 100년 넘는 상표권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WTO/TRIPs 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전 세계 44개국에서 관련 소송이 계속됐다. 2004년 유럽연합 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 각국 법원에서 판단하라는 결정을 내리자 혼란은 더 심해졌다. 유럽의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남미의 아르헨티나·브라질은 미국 회사 손을 들어줬다. 포르투갈이나 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에선 체코 회사의 배타적 사용권만 인정했다. 한국과 일본에선 두 개의 버드와이저가 함께 쓰이고 있는 상태다.

미국에선 바스마티(Basmati)라는 이름의 쌀 분쟁도 유명하다. 미국 곡물회사인 라이스 테크(Rice Tec)가 인도산 쌀 바스마티 품종을 개량해 1997년 테스마티(Tesmati)·카스마티(Kasmati)라는 이름으로 미국 특허를 얻었다. 인도 정부가 뒤늦게 “역사적으로 인도에서 이미 잘 알려진 명칭”이라며 특허무효를 신청했다. 하지만 미국 법원은 인도 정부의 요구를 기각했다.

한국 제품의 피해도 점차 커지고 있다. 대표적인 게 고려인삼이다. 고려인삼의 효능은 중국은 물론이고 유럽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를 이용해 한몫 보려는 외국인들이 국산 인삼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고려인삼을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럽 제약사 B사는 중국산 인삼으로 만든 제품에 대해 ‘100% 고려인삼을 썼다’는 광고를 하다 적발되기도 했다.

순창 고추장이란 상표를 사용하는 ㈜대상도 황당한 경험을 했다. 2001년 미국 교포가 운영하는 식품유통업체 리브라더스로부터 소송을 당한 것이다. 당시 리브라더스는 ‘Pure Spear(순수한 창)’란 상표를 등록해둔 상태였다. 대상은 2005년 최종 승소했다. 하지만 리브라더스는 여전히 ‘이천쌀’ ‘경기미’ 등의 이름으로 200억원대의 쌀을 유통하고 있어 국내 생산자들과 분쟁 중이다.

농식품부는 올해부터 이 같은 지리적 표시 해외 침해사례를 수집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내년부터는 WTO/TRIPs 조항을 통해 이를 시정해 나갈 방침이다. 농식품부 배호열 소비안전정책과장은 “피해 구제는 결국 민사소송을 통해 이뤄지지만 엉뚱한 사람들이 국내 유명상표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데는 지리적 표시제가 유용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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