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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판에 ‘正’ 자 쓰며 촌장 선거 개표 … 민주 실험 나선 중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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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중국 베이징 서쪽 근교의 농촌인 시왕핑촌에서 18일 치러진 촌민위원회 선거의 개표 장면. 한국의 초등학교 반장 선거처럼 칠판에 후보자의 이름을 적은 뒤 한 표씩 개표한 뒤 합산했다.

‘촌민(村民)위원회를 잘 뽑아서 새마을(新農村)을 건설하자’. ‘민주적 권리를 소중히 생각하고, 장엄한 한 표를 던지자’.

18일 오전 중국 베이징(北京) 시내 서쪽 자동차로 90분 거리에 위치한 먼터우거우(門頭溝)구 왕핑(王平)진 시왕핑(西王平)촌.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인 마을에 들어서자 곳곳에 붉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쓴 선거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는 중국의 최일선 행정 단위인 촌민위원회 대표를 뽑는 선거가 진행 중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시골마을 이장을 뽑는 선거다. 중국식 풀뿌리 민주주의 실험 현장인 셈이었다.

농민이 대부분인 이곳 인구는 161가구 354명. 만 18세 이상의 유권자는 263명이었다. 촌민위원회 주임(옛 촌장) 후보로 2명이 출마했고, 2명을 뽑는 촌민위원회 위원 선거에는 3명이 입후보했다.

주민들은 오전 7시부터 삼삼오오 투표장에 나왔다. 감독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본인 확인을 거쳐 투표 용지에 기표하는 방식은 한국의 직선제와 똑같았다.

그러나 중국식 직선제는 다른 점도 많다. 전국 동시 선거는 없고, 지역 사정에 따라 투표일을 정한다.

무엇보다 입후보 과정이 독특했다. 시왕핑촌의 경우 앞서 8일에 열린 촌민 대회에 참석한 촌민 172명이 직접 후보자를 추천하는 투표가 있었다.

당시 촌민위원회 주임 후보로 모두 5명이 추천돼 득표 수가 적은 3명이 사퇴했고, 위원 후보로는 10여 명이 추천됐으나 상위 득표자 3명만 후보 자격을 얻었다. 이 때문에 18일 실시된 투표는 일종의 결선 투표 성격을 띠었다.

중국에도 금품과 향응 선거가 있는지 궁금해 주민 웨이위산(魏玉善·72)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그러자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후보에게 표를 주기 때문에 식사를 대접하고 선물을 보내는 행위(請客送禮)가 필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환자나 외지에 나가 있는 유권자의 경우 이들의 가족이 위임장을 받아 가구당 최대 3명까지 대리 투표할 수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이날 76명이 대리 투표를 했다.

투표를 마친 류구이룽(劉貴榮·65·여)은 “현직 촌민위원회 주임이 지난 3년간 촌의 전체 소득을 증대시켜 주민들의 한 달 생활 보조금이 60위안(약 1만원)에서 80위안으로 늘어나 그를 찍었다”고 말했다.

오전 10시30분 올해 80세인 웨이위주(魏玉珠) 선거위원장이 투표 종료와 개표를 선언했다. 칠판에 후보자의 이름을 적고 그 밑에 ‘바를 정(正)자’를 써내려가는 방식으로 집계 작업이 이뤄졌다. 한국의 초등학교 반장 선거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었다.

결국 현 촌민위원회 주임이자 공산당원인 웨이시전(魏喜振·35) 후보가 유효표 257표 중 234표(91%)를 얻어 20표를 얻은 무소속 후보를 눌렀다. 즉석에서 당선증을 받은 그는 “더 살기 좋은 사회주의 신농촌을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갈 길 먼 직선제=중국에서 촌민위원회의 직접선거는 1988년 6월 처음 시작됐다. 단계적으로 확대돼 현재는 전국 60만 개 촌의 약 95%로 확대됐다. 촌민위원회는 3년 임기에 연임 횟수 제한이 없다.

촌보다 한 단계 높은 향(鄕) 단위에서도 직선제 실험을 시작했지만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그보다 높은 행정 단위는 국가주석까지 모두 간접선거로 뽑고 있다. 왕슈친(王秀琴) 베이징시 민정국 기층정권처 부처장은 “중국의 직선제는 긴 안목으로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장세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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