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세때 병마 찾아온 레이건의 경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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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나는 이제 인생의 황혼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하려 합니다."

1994년 11월 5일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자신이 치매에 걸린 사실을 처음 공개하며 이같이 말했다. 81년 저격 사건과 85년 대장암, 87년 전립선암 수술을 거뜬히 이겨내며 올해 91세로 역대 최장수 미국 대통령의 반열에 오른 그지만 치매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현재 LA 근교에 칩거 중인 그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며 말도 통하지 않는 중증 치매 증세를 앓고 있다. 거동도 불편해 2001년 집에서 미끄러져 오른쪽 골반 골절로 수술을 받기도 했다. 부인 낸시 여사조차 알아보지 못해 바깥 나들이는 물론 외부 인사의 초청도 일절 금지하고 있다.

의학적으로 레이건의 치매는 필연적 측면이 강하다. 세계적 치매 전문가인 미국 하버드의대 노화유전연구소 탄지 소장은 치매에 걸릴 위험 요인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연령▶가족력(家族歷)▶머리의 손상▶남성이라고 밝힌 바 있다. 레이건의 경우 이들 네가지 요인을 모두 갖고 있다는 것.

가장 큰 위험요인은 연령이다. 65세를 넘기면 5년마다 두 배씩 치매 발생률이 증가한다. 레이건에게 처음 증상이 나타난 것은 93년, 82세 때다.

두번째로 큰 위험요인은 가족력이다. 집안에 치매 환자가 많을수록 자신도 치매에 걸릴 확률이 증가한다. 레이건의 모친 넬 여사는 62년 치매로 사망했으며 그의 큰형 네일도 93년 치매 진단을 받았다.

레이건의 치매에 도화선 역할을 한 것은 89년 대통령 퇴임 후 멕시코의 친구 목장에서 승마 중 떨어져 머리를 다친 것이었다. 뇌 바깥에 피가 고인 경막외 출혈이어서 응급 뇌수술을 받았다. 뇌손상은 필연적으로 염증을 유발해 뇌세포의 기능을 떨어뜨려 치매를 악화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남성이었다는 것도 좋지 않았다. 여성의 경우 적어도 폐경 전까진 난소에서 치매를 막는 여성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레이건의 마지막 불운이라면 아리셉트와 엑셀론 등 치매 치료제가 97년에야 시판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홍혜걸 의학전문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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