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전과 닮은꼴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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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이 좋으니 걱정없다."

1997년 정부가 틈만 나면 강조하던 말이다. 그해 11월 외환위기를 맞을 때까지도 계속 그 말을 했다.

펀더멘털이 좋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다 보니 정부는 미시(微視)적인 대책에 매달렸다.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자 부도를 늦추는 부도유예협약을 만들었고, 원화 환율이 치솟자 이를 억누르기 위해 직접 시장에 개입했다.

5년이 지난 지금은 과열과 거품을 걱정할 정도로 상황이 딴판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부의 안이한 인식과 땜질식 대응은 그때를 빼닮았다."경기가 과열은 아니며, 가계대출도 우려할 수준이 아니다"는 것이다.

서울 강남에서 시작한 아파트값 오름세가 서울의 다른 지역과 수도권까지 옮겨붙었는데도 정부는 부동산 값 상승이 일부 지역에 국한된 현상이라고 강변한다.

지난 한해 동안에만 75조원(28%)이나 늘어난 가계대출에 대한 정부의 논리도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경기가 회복되면 소득이 증가하므로 이자를 갚을 능력도 커진다는 것이다.

경기가 좋아지면 소득은 빚 없는 부유층에서 주로 늘고, 이자 부담은 서민·중산층에서 주로 는다는 것을 정부도 모를 리 없는데 말이다. 이같은 상황 인식을 갖고 있다 보니 자연히 대책도 미봉책이다. 부동산에는 세무조사를 동원하고, 은행·카드사에는 대손충당금을 더 쌓도록 하는 식이다. 그나마 한 박자 늦게 말이다.

시중에 돈을 잔뜩 풀어놓고는 과연 이런 대책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궁금하다. 이에 대해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수출과 투자가 회복될 때까지 내수로 버텨야 하므로 당분간 금융완화 기조가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서민들의 내집 마련 꿈이 사라지고, 집집마다 빚더미에 올랐는데도 도대체 내수를 얼마나 받쳐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정부가 미적거리는 동안 우리 사회는 돈 있고, 재테크에 일가견이 있는 일부 계층이 돈을 벌면서 없는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심해지고 있다.

최근 은행강도가 활개치고, 경마·복권에 관심이 쏠리는 등 한탕주의가 만연하는 것도 점점 벌어지는 빈부격차를 단숨에 만회하려는 심리 탓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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