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민족이란 거대담론에 함몰되었던 1950~60년대. 온몸으로 전체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이 되길 외친 김수영. 그에게 이 땅은 자유로운 개인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국가적 억압에 맞서 “쉴 사이 없이 가야 하는 몸”(‘구슬픈 육체’)으로 살아야 할 역설의 땅이었다. (사진 출처 :『김수영 전집』2, 민음사)
시인은 반공포로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그것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의 여정이었다/ 가족과 애인과 그리고 또 하나 부실한 처(妻)를 버리고/ 포로수용소로 오려고 집을 버리고 나온 것이 아니라/ 포로수용소보다 더 어두운 곳이라 할지라도/ 자유가 살고 있는 영원한 길을 찾아/ 나와 나의 벗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현대의 천당을 찾아 나온 것이다/ 나는 원래가 약게 살 줄 모르는 사람이다/ 진실을 찾기 위하여 진실을 잊어버려야 하는/ 내일의 역설(逆說)모양으로/ 나는 자유를 찾아서 포로수용소에 온 것이고/ 자유를 찾기 위하여 유자철망(有刺鐵網)을 탈출하려는 어리석은 동물이 되고 말았다”(‘조국에 돌아오신 상병(傷病)포로 동지들에게’, 53년).
그러나 포로수용소의 가시철망을 뚫고 다시 돌아온 남녘도 개인의 자유가 완전히 구현된 ‘현대의 천당’은 아니었다. 그때 제1공화국의 여(與)와 야(野) 모두가 내세운 ‘자유민주주의’란 ‘반공’ 세력에만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는 반쪽짜리 민주주의였다. 4·19혁명과 함께 찾아온 ‘민주주의의 황금시대’ 제2공화국 치하에서도 그가 나머지 반쪽의 자유를 찾아 운 목탁이었음은 60년 10월에 쓴 미공개 유작 ‘김일성 만세’에 잘 나타난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그는 68년 6월 16일 교통사고로 숨졌다. 42주기 기일을 맞는 오늘에도 온몸으로 전체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이 되길 외친 그의 삶과 정신은 자유로운 시민이길 바라는 우리 모두를 깨우는 죽비(竹扉) 소리로 크게 울린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