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도… 회계법인도… "사느냐 죽느냐" 초긴장 (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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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지난 주 13개 대기업이 분식회계 혐의로 금융당국의 중징계를 받은 뒤 재계가 발칵 뒤집혔다. 기업 회계장부를 감사하는 회계법인들에도 비상이 걸렸다. 23조원의 분식회계로 침몰을 자초했던 대우사태에서도 드러났듯 불투명한 기업회계는 투자자·채권자에게 피해를 줄 뿐 아니라 나라 경제의 발전을 가로막는 암적 요소다. 회계대란의 현장과 뿌리깊은 분식회계를 근절할 대안을 2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최근 한달 동안 외부감사인(공인회계사)들과 '싸우느라' 다른 일은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재고 자산도 워낙 낮게 평가하는데다,분명히 받을 수 있는 외상매출금인데도 '회수 불능'으로 처리하자고 했어요. 예전에는 우리 의견을 거의 들어줬는데…."

상장기업 A사의 김모 사장은 "흑자 규모가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외부감사인에게 하소연하기도 하고, 지인들을 통해 회계법인에 압력도 넣어봤지만 효과가 없었다"고 말했다. 미국 엔론사태로 인해 아서 앤더슨이 파산 위기에 처하는 등 부실감사로 인한 '응징'이 국내외에서 강화되자 감사보고서를 놓고 회계법인과 기업간의 줄다리기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비상 걸린 기업 재무회계팀=쌍용양회공업 회계팀은 최근 한달 동안 팀원 전원이 밤 늦도록 회계장부에 하자가 없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을 벌였다. 회계법인으로부터 '적정' 의견을 얻기 위해서다. 쌍용은 지난해 투자 손실을 장부에 반영하지 않았다가 '의견 거절'을 받아 주식이 관리종목으로 지정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H사는 지난 9일 이사회 멤버 중 절반만 참석한 가운데 이사회를 열어 15일로 예정됐던 주총을 부랴부랴 연기했다. 회사 관계자는 "부실채권에 대한 추가 상각을 요구한 감사인의 권고를 거절했더니 회계법인측이 아예 의견을 보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올해부터 감사의견이 '부적정'이나 '의견 거절'이 나올 경우 상장이 폐지되는 '서든 데스'제도가 시행되자, 기업과 회계법인의 승강이가 더 많이 벌어지고 있다. 대우전자·오리온전기·고합 등 6개사가 올해 '의견 거절'이나 '부적정' 의견을 받아 상장폐지 절차를 밟고 있다.

◇더 깐깐해진 회계법인=회계법인들은 고객을 선정할 때부터 재무상태 등을 철저히 알아보고, 감사보고서를 점검하는 심리기능을 강화하는 등 감사의 질을 높이려 하고 있다. 감사를 잘못했다가는 통째로 뒤집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부실감사에 대한 소액투자자나 주주들의 소송이 많아진 것도 이유다. 삼일회계법인은 심리전담 회계사를 15명에서 최근 25명으로, 삼정은 10명으로, 안건은 8명으로 늘렸다. 영화 최종철 부대표는 "고객 회사를 받을 때 자금상황 등을 체크해 일정 점수에 미달되면 아무리 감사 수수료를 많이 주겠다고 해도 거절하고 있다"고 말했다.

◇회계 기준 명확해야=기업 재무팀과 회계법인 관계자들은 당국이 회계장부 작성 기준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L그룹 재무팀장은 "자산 매각·매입이나 상각 등에 대한 회계처리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금융감독원 등에 자문을 구하거나 예규를 받는 경우가 많다"면서 "'합리적인'이나 '적정한' 등의 모호한 문구들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일부 기업들이 감가상각 기간 때문에 처벌 받은 것처럼 당국에 문의하고 장부를 작성했는데도 문제가 된다면 앞으로 문서로 질의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S그룹 경리부장은 "당국이 한국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미국식 회계제도를 그대로 적용하려 하고 있다"면서 "결합재무제표까지 작성토록 하는 것은 투명성을 높이자는 취지는 좋으나 과도할 정도로 엄격해 너무 번거롭고 비용도 많이 든다"고 말했다.

김동섭·표재용·장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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