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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껍질에 모여드는 귀찮은 초파리 유전자 연구선 '귀염둥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0면

과일을 먹은 후 껍질을 버리지 않고 놓아두면 쌀알보다 더 작은 초파리가 모여드는 걸 흔히 볼 수 있다.

과일로 식초를 만들 때 잘 모여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fruit fly'(직역하면 과일파리)다. 학문적으로는 '드로소필라(Drosophila)'라고 부른다.

하찮은 이 작은 곤충이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유전자 연구에 널리 쓰이며, 인간 유전자의 기능 규명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한 동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초파리가 생명과학 연구에 일찍부터 사용된 것은 여러가지 특징 때문이다.

첫째, 알에서부터 깨어나와 다음 자손을 낳기까지 10일밖에 걸리지 않을 만큼 세대가 짧다.

둘째, 사육이 쉽고 많은 알을 낳기 때문에 수를 늘리기 쉽다.

셋째, 다양한 돌연변이를 많이 얻을 수 있다.

이런 장점 때문에 초파리는 유전학 분야에서 1백년 이상 사용돼 왔다. 그로 인해 축적된 방대한 지식과 고도로 발달된 연구기술은 지놈 연구가 활발한 요즘 더욱 각광받는다.

초파리를 실험동물로 가장 활발하게 연구하는 분야는 유전자 발굴과 그 기능 연구다.

유전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기 위한 방법은 두가지다.

유전자를 고장나게 하거나 유전자의 작용을 인위적으로 강화시켜 생물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보는 일이다.

초파리의 경우 인위적인 방법을 써서 원하는 돌연변이를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하는 유전자의 기능을 정상보다 몇배 이상 강하게 만들 수 있는 다양한 기술이 개발돼 있어 이러한 연구를 손쉽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라는 유전자가 고장났을 때(이것을 돌연변이라 한다) 원래는 빨간색이던 초파리의 눈이 하얗게 됐다면 A라는 유전자는 눈에서 빨간색 색소를 만드는 데에 작용하는 것이다.

B라는 유전자를 초파리 눈에서 강하게 작용시켰을 때에 초파리의 눈세포가 많아졌다면 B라는 유전자는 눈세포의 증식을 촉진하는 기능을 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초파리의 특성을 이용한 대표적인 연구결과는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뉴스라인 볼하르트 박사와 미국 프린스턴대의 에리크 비샤우스 박사가 1980년대 초반에 동물 배아(embryo) 발생에 필요한 유전자를 대량으로 찾아내고 그 기능을 밝힌 것이다. 두 박사는 95년 이 업적으로 노벨의학상을 수상했다.

최근에 사람과 초파리의 지놈프로젝트가 완성되면서 사람은 3만~4만개의 유전자가 있으며, 초파리는 1만4천개의 유전자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람의 유전자가 초파리의 두배에 달하지만 사람의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의 70% 정도가 초파리에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나 지놈프로젝트는 이들 수많은 유전자의 존재와 여기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고 추측되는 수많은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에 관한 정보만 제공했을 뿐 이들 대부분의 유전자 기능은 밝혀주지 못했다.

유전자들의 기능을 밝히는 것은 각 유전자가 고장났을 때 나타나는 각종 질병의 치료법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전자의 기능을 연구하려면 유전자의 작용을 살아있는 세포 안에서 자유롭게 조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그 방법을 쓸 수 없으며, 생쥐·원숭이 등을 이용하면 막대한 돈과 시간이 든다. 그 동물들을 이용하는 방법도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초파리는 다양한 분야의 유전자 기능연구에서 이러한 한계를 모두 극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미국 오리건대의 아마라 박사 연구팀은 사람이 마약인 코카인 중독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의 존재와 기능을 초파리 연구를 통해 밝힐 수 있음을 보여줬다.

또 초파리 지놈 해독이 완료된 뒤 캘리포니아대의 그립스코프와 라이터 박사팀은 인간 유전자와 초파리 유전자의 지놈 코드를 비교 검색해 현재까지 알려진 9백26개의 인간질병 유전자 중 적어도 7백15개 이상에 대한 유사 유전자가 초파리에도 존재할 뿐만 아니라 동등한 분자기능을 수행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과일 껍질에 모여드는 작은 초파리가 앞으로 인간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좀더 귀엽게 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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