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40> 제2부 薔薇戰爭 제2장 楊州夢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물론 두목은 생전에 장보고의 실물을 한번도 만난 적은 없었다. 두 사람은 동시대 사람이었으나 그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서로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우국지사이자 당나라 최고의 시인이었던 두목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장보고를 최고의 의인으로 존경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살아있는 장보고의 열전을 자신이 직접 저술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두목은 꿈의 도시 양주에서 어떻게 장보고를 만나게 된 것일까.

그에 앞서 32세의 우국청년 두목이 양주로 왔을 무렵 그는 날로 쇠퇴해가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오히려 술과 여색을 즐기는 방탕한 세월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나이 들어 양주에서의 추억을 기록한 『양주몽기』를 쓴 것도 결국 그가 젊은 시절 양주에서 그 아름다운 기녀들과 보냈던 술과 장미의 나날들을 기록해놓은 회상기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두목은 자신이 쓴 '양주삼수(楊州三首)'라는 시 속에서 양주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가로에 늘어선 천릿길의 버드나무 두개의 성에 어린 붉은 저녁노을".

두목은 천릿길의 버드나무,즉 버드나무로 상징되는 술과 여인들을 탐닉하는 방탕세월로 한바탕의 청춘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에 쓴 유명한 시 한 수가 오늘날까지 남아 전해오고 있다.양주는 양자강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대운하가 시작되는 곳이었는데, 이곳 표수현(漂水縣)에서 양자강으로 이어가는 운하에는 진회(秦淮)라는 유명한 유람지가 있었다.

이 진회에서 술을 마시며 두목은 하룻밤을 지냈는데, 이 때 느낀 시흥을 두목은 '진회야박(秦淮夜泊)'이란 제목의 시로 노래하였다.이 시는 두목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개는 차가운 물을 감싸고

달빛이 모래를 덮는 밤

진회에 밤배를 대니

술집이 가까웠네.

술집 아가씨들 나라 잃은 서러움을 알지 못하고

강 건너 사이를 두고

오히려 후정화(後庭花)를 부르고 있구나."

'후정화'는 육조시대 때 진(晉)나라의 후주(後主)가 귀족 미희들과 잔치를 할 때 부르던 노래로 그 당시에 뛰어난 미인이었던 장귀비와 공귀빈(孔貴嬪)의 미모를 찬미하는 노래였지만 결국 이러한 방탕으로 진나라는 망하게 됨으로써 '후정화'는 '망국지음(亡國之音)'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두목의 대표적인 이 시는 양주의 운하 진회의 강가에서 당시 유행하던 가곡을 노래하는 기녀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날로 쇠퇴해가는 당나라의 국운을 걱정하는 우국청년으로서의 면모를 엿보게 하는 것이다.

이 무렵 두목이 얼마나 방탕생활을 했던가는 송나라의 호자(胡仔)가 쓴 문집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오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일찍이 우기장(牛奇章)이 양주에 장수가 되었을 때 '목지(牧之-두목의 자)'가 막중(幕中)에 있었는데, 평상복 차림으로 놀러다님이 많았다. 우기장이 이 말을 듣고 거리에 몇 사람으로 하여금 몰래 목지를 따라다니며 불의의 사고를 예방하게 하였다. 훗날 목지가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아 떠나게 됨에 우기장이 목지를 불러 종일(縱逸)을 경책하였다. 목지가 이를 감추고 부인하자 우기장이 한 상자를 가져오게 명하니 이는 모두가 거리에서 평상복을 입고 노닐던 목지의 행동을 낱낱이 보고한 문서였는데, 그 기록은 공평하고 정확하였던 것이다. 이 기록을 보고 비로소 목지는 크게 감복하였다…."

관복을 벗고 평상복의 변복을 하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양주에서 벌인 두목의 무분별한 행동을 경책한 호자의 기록을 통해 두목이 얼마나 방탕한 생활을 양주에서 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난잡한 생활을 기록한 문서가 한 상자가 될 정도로 양주에 있어서의 두목의 생활은 가히 팔난봉이었던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