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제2부 薔薇戰爭 제1장 序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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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가까운 시일 안에 반드시 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장보고의 확신은 그대로 적중된다. 그로부터 2년 뒤 정년은 장보고를 실제로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상황을 당나라의 시인 두목은 『번천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장보고가 이미 신라에서 귀하게 되었는데, 정년은 뒤엉켜서 관직에서 떨어져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사수(泗水)의 연수현(漣水縣)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수현의 수장 풍원규(馮元規)에게 말하기를 '나는 동으로 돌아가서 장보고에게 걸식(乞食)하려 한다'하니 풍원규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와 장보고의 사이가 어떠한가. 어찌하여 가서 그 손에 죽으려 하는가.'

정년이 말하기를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것은 전쟁에서 깨끗하게 죽느니만 못하다. 하물며 고향에 가서 죽는 것에 비하랴'하고 정년은 드디어 떠나가서 장보고를 찾아뵈니 장보고는 술을 대접하여 극진히 환대하였다…."

이렇듯 장보고와 아우 정년은 극적으로 또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섬세하게 장보고와 정년의 인물전을 기록한 두목은 도대체 누구인가. 당나라 말기인 만당(晩唐) 최고의 시인 두목. 일찍이 당나라의 시성이었던 두보(杜甫)와 비교되어 소두(小杜)라고 불리던 두목. 그가 만약 『번천문집』에서 '장보고와 정년'의 열전(列傳)을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장보고는 역사의 뒤안길로 실종되어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김유신(金庾信)'의 열전을 상중하로 나누어 제일 먼저 기록하고 나서 그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신은 그 뜻한 바를 행할 수 있게 되어 중국과 협동모의해서 삼국을 합쳐 한집을 만들었고, 능히 공명으로서 평생을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義勇)이 있어도 중국의 서적(書籍)이 아니었던들 민멸(泯滅)하여 전문(傳聞)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김부식은 '장보고와 정년'에 대해서도 열전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김부식의 표현대로 김부식이 기록한 '장보고와 정년'의 열전은 두목이 쓴 『번천문집』, 즉 중국서적을 그대로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만약 두목이 이처럼 '장보고와 정년'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장보고는 역사 속에서 민멸되어 행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송나라의 사가 송기(宋祁)는 『신당서(新唐書)』를 편찬하면서 두목이 쓴 '장보고와 정년'의 열전을 인용한 후 이렇게까지 극찬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원망과 해독으로서 서로 끼치지 않고 나라의 우환을 먼저 생각한 것은 진(晉)에 기해(祁奚)가 있었고, 당나라에 분양(汾陽)과 장보고가 있었다. 누가 동이(東夷)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인가."

두목이 장보고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송기는『신당서』에서 장보고에 대해 '누가 동이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인가'하고 극찬할 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장보고를 기록하지 못함으로써 장보고와 그의 아우 정년은 역사 속에서 실종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두목은 어째서 신라사람 장보고와 그의 아우 정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일까.두목은 그냥 전해오는 풍문에 의해서 장보고와 정년의 평전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탐문하고, 때로는 직접 현장의 인물들을 찾아가 증언을 들음으로써 자칫하면 역사 속으로 민멸될 뻔하였던 장보고를 생생하게 부활시켜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두목, 그는 누구인가.

그는 어떻게 해서 장보고를 만나게 되었는가. 장보고의 무엇이 당나라 최고의 시인 두목의 마음을 매료시켜 장보고를 백대의 스승인 주공(周公)과 비교하고, 장보고를 당나라 최고의 공신이었던 곽분양(郭汾陽)보다 더 뛰어난 인의(仁義)의 성현(聖賢)으로 찬양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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