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제2부 薔薇戰爭 제1장 序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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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그러나 장보고는 낭혜화상이 신신당부하였던대로 불상의 머리를 잘 보관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지금도 완도의 장좌리에는 '장군묏등'이란 이름의 공동묘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예부터 공동묘지처럼 쓰이던 곳으로 어린 아이가 죽으면 독장을 하거나 풍장을 하던 곳인데 현지 사람들은 이 등성이에 '목 없는 장군 묘'가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 '목 없는 장군 묘'야말로 장보고 장군 묘라고 믿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장보고는 낭혜화상이 참언하였던 것처럼 부처의 머리, 즉 자신의 머리를 잘 보관하지 못함으로써 살아서 천하(天下)를 얻는 대신 죽어서 해신(海神)이 될 수밖에 없었던 명운을 타고난 영웅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장보고와 정년에게 단평을 내려준 낭혜는 홀연히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낭혜가 다시 역사 속에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20여년 뒤인 당나라 무종(武宗)의 유명한 '회창(會昌)의 폐불(廢佛)'정책으로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하였을 때였던 것이다.

도교(道敎)를 믿어 불교는 물론 모든 종교를 탄압하였던 이 정책은 사찰 4천6백개를 헐고, 26만여 명의 승려와 여승을 환속시키는 미증유의 법난이었는데, 낭혜는 845년 귀국할 때까지 최치원이 기록한 비문의 내용처럼 '오로지 병든 사람을 돌보고, 고아와 자식이 없는 늙은이들을 도와주는 보시'로 철저하게 두타(頭陀)의 수행을 펼치고 있었다.

그가 신라로 귀국한 지 50여년 후, 산동반도의 등주(登州)에 있는 곤륜산(崑崙山)에 무염원(無染院)이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 무렵 산동반도에 사는 신라인들은 낭혜무염선사를 신앙의 대상으로 숭상하고 있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최치원이 기록한 중국에서의 다음과 같은 행적은 정확한 사실인 것이다.

"…그 이름을 듣는 사람은 멀리서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를 표하여 동방의 대보살(大菩薩)이라고 크게 떠받들었다. 중국에서의 30여년 간의 행적은 이와 같았다."

우르릉 쾅.―

다시 하늘을 찢는 우레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장보고는 꼼짝도 않고 손에 들린 목 없는 불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소리쳐 말하였다.

"어디 있느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이냐."

순간 장보고의 귓가에 선선히 불상의 머리를 품속에 간직하면서 맹세하였던 정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형님. 다시 만날 때까지 아우는 이 불두를 신표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겠나이다."

'다시 만날 때까지'라고 아우 정년은 말하였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내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스스로 맹세한 것이 아닐 것인가.

돌아올 것이다. 아우 정년은 반드시 내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 때였다.

군막 안에서부터 누군가 황급히 달려 나오고 있었다. 어려계였다. 그는 장보고가 폭풍우 속에 홀로 서 있음을 알고 자신의 몸으로 장보고를 감싸며 말하였다.

"대사 나으리.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시나이까. 자칫하면 몸을 상하게 되실 것을 모르시나이까. 어서 안으로 드시옵소서."

그러자 장보고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누가 날 찾아올 것 같아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네."

"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한밤중에 도대체 누가 찾아온다는 말씀이시나이까."

"폭풍우가 몰아치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도 그는 반드시 내 곁으로 찾아올 것이네."

"그 사람이 누굽니까."

어려계가 묻자 장보고는 껄껄 소리 내어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가까운 시일 안에 반드시 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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