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 금기된 사랑 인간 삶의 원형 보여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유명 소설가나 TV스타가 아닌 다음에야 출판시장에서 자기 이름을 하나의 브랜드명으로 버젓이 내걸고 성공할 수 있는 저자는 드물다. 그런데 교보문고 인터넷 사이트에서만 1백80여종이 검색된다는 그리스 신화서들을 자신의 이름 석자로 평정한 주인공이 이윤기다. 20여년 연구한 신화 전문가, 동인문학상 수상 작가, 『장미의 이름』 등을 옮긴 번역가라는 경력을 배경으로 처음 브랜드명을 단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2000년 6월 초판이 나온 이래 어느새 1백쇄를 찍었다.

'이윤기' 브랜드의 특장은 동서양 신화세계를 넘나드는 절묘한 설명, 어려운 고대 그리스의 희곡도 구수한 우리 옛이야기처럼 풀어나가는 솜씨, 신세대 감각이 살아 있는 깔끔한 문체 등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 역시 브랜드 값을 한다. 아니, 전편이 신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돕는 원론격이었다면 '사랑의 테마로 읽는 신화의 12가지 열쇠'란 부제의 이 신간은 보다 심화한 주제로 인간 원형의 세계를 안내한다.

저자는 우선 가장 많이 들었던 두가지 질문으로 2권 말머리를 연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나요?", 그리고 "그리스 로마의 신화는 왜 윤리적이지 못한가요? 아이들에게 읽히기가 겁나요"라는 것이다.'문화적 사대주의'가 아니냐는 비난까지 섞인 첫째 질문에 이씨는 "내가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그것이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우리'란 조선 민족으로서의 '우리'라기보다는 인류의 한 갈래로서의 '우리', 즉 보편적인 사람으로서의 '우리'에 가깝다고 밝힌다. '우리'는 몇 가지 기본적인 경험을 공유하는데, 죽음이나 성(性)적인 경험 등이 그 예다. 제우스와 헤라 커플처럼, 그리스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오누이 혼인만 해도 그렇다. 일본의 창조신인 이나자기와 이자나미, 중국의 창조신인 복희와 여와 신화는 물론, 우리 민족 설화에도 등장하는 보편적 소재라는 것이다.

그럼 세계 각국의 신화들이 그런 '부적절한 관계'를 공통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처음의 세상에는 배우자가 누이 아니면 오라버니밖에 없었고", "신화가 전하는 이야기는 도덕이나 윤리가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잡기 이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금기도 없고, 어떠한 도덕적 관념으로도 재단할 수 없는 인간 삶의 원형을 간직한 신화 속 성과 사랑 이야기들을 통해 이 주제에 대한 옛 사람들의 생각, 그리고 "인간의 바닥을 흐르는 저 낯선 강의 모양"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엔 도덕군자가 들으면 의분을 금치 못할 사랑 얘기들로 가득하다. 황소를 사랑한 여성, 암염소를 사랑한 신, 전처 소생을 사랑한 계모, 오라버니나 아버지를 사랑한 여성, 어머니와 결혼한 남성, 처제를 사랑한 남성 등…. 하지만 "신화는 어쩌면 도덕과 윤리가 진화한 역사를, 이야기 형식을 빌려 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그러한 '이루어져서는 안될 사랑'의 결말은 모두 비극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밖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형이 된 티스베와 퓌라모스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인류 최초로 여성 해방 운동을 시도한 여성일 지 모를 기원전 7세기 시인 사포의 동성애 이야기 등도 다뤄진다.

이렇게 이씨가 건네주는 '열쇠'꾸러미는 옛 신화의 세계에만 맞는 것이 아니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일단 신화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 뒤에 나있는 '현실'의 문도 의외로 쉽게 열린다. 요즘 한창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동성애·트랜스젠더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주제에 맞춰 선별한 풍부한 도판과 설명도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자, 1권에서 신화라는 이름의 자전거 타기를 배운 독자들은 이제 2권을 통해 페달을 더 힘껏 밟을 차례다.

김정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