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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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그때 우리집 전재산은
잘 닦은 놋대야와
아버지의 검은 구두 한 켤레

군복을 염색해 입은
청년이 수갑이 채워진 채 끌려와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순경이 다그쳤다
-이 집이지?
-바로 여기서 훔쳤지?

그의 짙은 검은 눈썹 같은 어둠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저문 내 저녁 문 앞에
몰려와 다그친다
-최정례(1955~ )'저녁에 잡혀온 도둑'중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지? 그때 없어졌다던 물건은 은촛대였는데. 사제도 장 발장도 아니지만 우리는 저마다의 일생 속에 한 권씩의 『레미제라블』을 가지고 있다. 무심코 넘겼던 그 페이지 다시 펼치니 일생의 어둠이 와 서서 다그친다. 이 집이지? 나는 그때, 잃은 사람이었던가 훔친 사람이었던가.
김화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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