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주일 前감사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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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28일 84세를 일기로 타계한 이주일(李周一) 전 감사원장은 5·16혁명에 참여했으면서도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또 중년 이후엔 조용히 장학사업에 전념했으며, 군대에서 반평생을 보내고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으나 국립묘지에 묻히기를 거부했다.
박재헌(朴宰憲·83) 전 감사원 정책자문위원은 "고인은 강직한 성품에 원칙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긴 분이었다"며 애도했다.
朴대통령 정치권유 거부
고인은 1961년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주도한 5·16혁명에 참여했으나 혁명 주체들과는 거리를 두고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국가재건 최고회의 부의장을 지낸 뒤 대한체육회장(62년)과 감사원장(64~71년)을 역임했다. 朴 전 대통령은 72년 유신(維新)직후 고인에게 국회의원에 출마하라고 여러 차례 권했다고 한다. 생사를 함께 한 오랜 친구로서의 배려였다. 하지만 李전원장은 "군인이 정치를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며 끝내 사양했다.
함북 경성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 朴전대통령과의 인연도 여기서 시작됐다. 고인은 해방이 되자 육사(특별 7기)를 나온 뒤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한국전쟁 때는 백마부대 28연대장으로 백마고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철원 일대를 우리 땅으로 편입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육군 12사단장, 2사령부 참모장 등을 거쳐 63년 대장으로 예편했다.
"내가 국가 위해 뭘 했나"
고인은 국립묘지에 묻히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전사(戰死)하지 않는 한 절대로 국립묘지에 묻히지 않겠다. 내가 국가를 위해 한 것이 뭐가 있길래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나. 더 훌륭한 일을 한 분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놓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유족들은 이런 뜻을 받들어 경기도 안성의 한 공원묘지에 고인을 모셨다.
그는 강직한 감사원장이었다. 고인을 모셨던 박재헌씨의 회고다.
"원장은 병풍을 들고 찾아온 한 정부투자 은행장에게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이 어찌 이럴 수 있느냐'며 호통을 쳤습니다. 부하 직원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참 강직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로 그친 게 아니었습니다. 李원장은 그 은행장을 문책까지 했습니다."
고인은 71년 감사원장에서 물러난 뒤 장학사업에 전념했다. 퇴직금과 지인들이 지원해 준 돈으로 함북 장학회를 만들었다. 다른 공식적인 직책을 모두 사양했으나 장학회장직은 건강이 나빠진 98년까지 갖고 있었다.
30년간 장학사업만
李전원장은 5·16혁명에 대해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5·16혁명에 관해 단 한번도 언론과 인터뷰하지 않았다.
아들 창걸(昌傑·52·무역업)씨는 "선친은 집안에서도 5·16혁명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며 "아마 혁명 당시 가졌던 사명감이 군인들의 정치 참여로 퇴색된 것을 안타까워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고인은 독서를 좋아했으며, 『고희산(古稀山)』 등 시집 일곱권을 펴내기도 했다.
최익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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